신앙/말씀과 묵상

고난은 /김상오

elimcy 2015. 7. 8. 11:13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마10:29,31)

두 마리에 1000원(?)인 참새는 다섯 마리에 2000원이었다.(눅12:6) 네 마리 사면 한 마리는 덤으로 주는 싸구려 생명이 바로 참새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모든 환경은 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조성되거나 허락된 것이다. 우연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참새의 생명도 귀히 여기실진대 천하보다 귀한 우리의 생명이랴?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환경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허락된 것임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사랑하시면서도 고통스러운 환경 속으로 넣으시는가? 그것은 우리 자아(自我)를 깨기 위한 것이다. 우리 안에서 영으로 거듭난 새 사람이 드러나려면 육에 속한 옛 사람(자아)은 죽어야 하고, 자아가 죽으려면 육신의 생활(환경)이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자아는 육신의 생명이므로 육신의 삶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육신적 생활이 만족스러우면 자아는 살아서 힘을 얻고 육신적 생활이 타격을 입으면 자아도 상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자아를 부수기 위해 부득이 우리 육신(의 생활)에 손을 대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옥합은 귀한 것이지만 깨어지지 않으면 그 안에 들어 있는 향기(향유)가 밖으로 흘러나올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 몸과 육신의 삶도 아끼시지만 영의 생명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에 부득이 영혼의 유익을 위해 육신의 삶을 치신다. 물론 우리 옛 사람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이루어지지 고난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고난이 없으면 우리가 그 십자가(우리의 죽음)를 망각한다는 것이다. 

편안할 때 우리는 (사탄의 시험으로) 우리가 여전히 죽지 않은 자인 것처럼 생각하고, 영(그리스도)의 생명을 따라 살지 않고 여전히 육신의 생명을 따라 (내 생각과 혈기와 정욕으로) 살기 쉽다. 고난은 그런 우리의 형편을 감안한 하나님의 배려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하심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필요한 교훈 곧 우리의 죽음과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요 생명임을 알고 그 생명으로 사는 것을 배운다면 우리 삶은 평안하며 평탄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