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찬양

[스크랩] 한국찬송가의 예배학적 근거

elimcy 2017. 9. 27. 16:49

한국찬송가의 예배학적 근거

 

이천진 목사 (이화미디어고등학교 교목)

Ⅰ. 한국찬송가와 한국인이 드리는 예배

다음의 네 예배학자들은 한국교회 예배의 토착화에 대하여 동의하고 있다. 기독교장로회 예배학자인 박근원은 현대신학의 전환과 함께 예배를 새롭게 이해하고 갱신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제3세계 신학, 여성신학, 토착화신학의 등장으로 예배도 토착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박근원은 예배의 발전사는 토착화의 역사였다고 밝히고 있다. 예수교장로회 예배학자인 정장복은 예배의 토착화를 거부하는 것은 100년을 넘긴 우리 기독교 예배의식을 이방종교로 머물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예배의 토착화가 이루어질 때, 서양적인 그리스도가 이 땅의 그리스도가 되는 감회를 느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정장복은 이제 백 년을 넘긴 한국교회가 보다 활기찬 생명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고유한 진리의 몸체에 한국의 옷을 입혀 보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예배의 토착화를 역설하였다. 기독교성결교 예배학자인 조기연은 초대교회라고 하는 기독교 공통 유산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동시에 각 전통의 특징을 살리는 예배, 그리고 각 나라와 문화에 속한 회중의 신앙과 영성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예배를 이룩하는 것이 현대 예배의 주된 흐름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조기연은 전통과 문화, 이 두 가지를 잘 조화시킨 예배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모습의 예배라고 예배의 토착화를 주장하였다. 감리교의 예배학자인 남호는 기독교의 메시지를 한국의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구조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하면서 예배가 한국인의 영적이고 신앙적인 것을 보다 깊고 넓게 담는 것이 중요하다고 예배의 토착화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남호는 변선환의 주장을 인용하였다. “한국 선교 도상에 서 계시는 그리스도는 문화적 종교적 제국주의자로서 군림하는 문화의 지배자가 아니라 오히려 한국 문화를 사랑하고 섬기는 문화의 종으로 역사하고 계신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공식적인 입장도 예배의 토착화에 대하여 동의하고 있다. 가톨릭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발표한 「전례 헌장」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공동체의 신앙과 유익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문제에 관해서 교회는 엄격한 획일성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는 다양한 민족과 국가들의 특성과 능력을 존중하고 배양한다. …그러한 것들을 예배에 수용하기도 한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예배학자인 추풍코는 예배의 문화화는 “예배의 본문과 의식들을 해당 지역의 문화 속으로 삽입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하면서 예배의 토착화에 동의하고 있다. 세계교회협의회가 몬트리올에서 발표한 “예배보고서”도 예배의 토착화를 인정하고 있다. “기독교 예배의 토착화는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 요구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변형되고 거룩하게 된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다시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것이다.” 이러한 학자들의 주장과 가톨릭과 개신교의 공식적 입장에 근거하여 한국찬송가로 한국인이 드리는 예배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1.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사건

정교회 신학자인 플로로프스키는 예배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하였다. “기독교 예배는 그것이 참된 기독교의 예배라면, 결코 독백이 아니라 대화이다.… 기독교 예배는 하느님의 부르심과… 그분의 전능하신 행위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감리교 예배학자인 폴 훈은 “기독교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보여주신 하느님의 계시와 그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루터교 신학자인 피터 부르너는 “예배란 우리 주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으로서 인간인 우리는 기도와 찬송으로 그분에게 응답하는 것이며 그 외에 다른 것은 행해지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 성공회 신학자인 언더힐은 “예배는 그것이 어떠한 수준과 형태를 취하고 있든지 간에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의 응답이다.”라고 하였다. 존 헉스터블은 “기독교의 예배란 하느님과 그의 백성과의 대화이다.” 라고 하였다. 지글러는 “기독교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느님 자신의 인격적인 계시에 대한 인간들의 인격적인 신앙 안에서의 정성어린 응답이다.”

위에서 열거한 여섯 신학자들의 예배에 대한 정의를 종합하면, 예배는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사건이다.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은 언어, 노래, 이미지, 마음(영성)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한국인이 하느님과 깊이 만나려면, 한국인의 언어, 한국인의 노래, 한국인의 이미지, 한국인의 마음과 영성으로 만나야 한다. 그래서 한국인이 드리는 예배에서는 한국찬송가를 불러야 한다.

플로로프스키와 존 헉스터블은 대화를 강조하였다. 한국인이 하느님과 깊은 대화를 하려면, 한국인의 언어와 노래로 대화를 할 때에 가능하다. 폴 훈과 부르너, 언더힐은 계시와 응답을 강조하였다. 진정한 응답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러 나오는 것이다. 남의 응답을 번역하여 번역판송가를 부르는 것은 진정한 응답이 아니다. 지글러는 정성어린 응답을 강조하였다. 정성어린 예배는 나를 드리는 것이다. 나를 헌신하는 것이다. 나의 언어, 나의 노래, 나의 마음을 드리는 것이 정성어린 예배요, 정성어린 응답이다. 한국인의 언어, 한국인의 노래, 한국인의 이미지, 한국인의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가 바로 한국인이 하느님과 깊이 만나는 “한국인이 드리는 예배”이다. 그래서 한국인이 드리는 예배에서의 찬송은 한국찬송가인 것이다. 정장복은 「예배의 신학」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이 대화는 어느 주일 오후에 미국의 대표적인 교단본부에서 찾아온 의식이 있는 젊은 목사와의 사이에서 있었던 것이다.… 한국교회를 분명히 갔었는데 예배당 건물과 내부구조가 미국의 것과 조금도 차이가 없었고, 회중들이 부르는 찬송도 자신들이 부르는 것과 같은 것이었는데 단지 거기 모인 사람들만이 미국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대답이었다. 그래서 자신은 한국 땅에서 한국 사람들과 함께 서구식 예배당에서 서구 찬송을 부르면서 서구식 예배를 드렸다고 말하였다.

 

2. 전통과 문화가 만나는 사건

조기연은 “예배는 전통과 문화라는 두 가지 축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전통은 기독교 예배 전통을 말하는 것이고, 문화는 특정 예배 공동체가 속한 지역의 언어, 관습, 정서 등을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 예배 전통은 초대교회의 예배 전통, 동방 교회의 예배 전통, 서방 교회의 예배 전통, 종교 개혁적 예배 전통 등이 있다. 초대교회 예배 전통의 특징은 말씀과 성만찬으로 이루어진 예배의 이중적 구조이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예배 전통의 특징에 대하여 박근원은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인 배경과 그 당시의 지정학적인 요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행위를 이렇게 믿도록 했으며 그 신앙의 표현이 이런 예배로 표현되게 하였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초대 기독교 예배를 연구한 남호는 “기독교 예배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로부터 비롯되었다. 한 종교의식은 그 종교가 속해 있는 문화의 표현 양식을 통해 나타난다.”고 하였다. 동방교회 예배 전통의 특징은 예배 행진, 입당송으로 부르는 삼성창 등이 특징이다. 박근원은 동방교회 예배 전통의 특징에 대하여 “예배 행진은 이 도시의 정치적인 행렬과 아주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라고 하면서, 동방교회 예배 전통이 헬라어와 그 문화를 포용한 것이라면, 서방 교회의 예배 전통은 라틴어와 그 문화를 포용한 예배의식이다. 라고 하였다. 박근원은 서방교회의 예배 전통의 특징에 대하여 “로마에서 발전된 특유의 요소는 사순절을 비롯한 교회의 절기행사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라고 하면서 “서방교회의 예배 전통은 로마의 예전과 프랑스-독일의 관습과 정신이 합류하여 태동한 것”이라고 하였다. 종교 개혁적 예배 전통의 두드러진 특징은 말씀의 강조이다. 그래서 루터는 독일어 찬송과 독일어 미사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특징은 예배가 성만찬 중심이 되어, 미신적인 요소까지 곁들이게 되고, 미사가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로 행해지면서, 설교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고, 성서봉독마저도 생략되는 상황에서 비롯된 예배 전통이다.

위에서 열거한 네 신학자들의 주장을 종합하면, 예배는 전통과 문화가 만나는 사건이다. 서양인들은 기독교 전통과 자신들의 문화와의 깊은 만남을 통하여 생동감 넘치는 예배 전통을 창조하였다. 한국교회에서 드리는 예배가 역동적인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 전통과 한국 문화가 깊이 만날 수 있을 때에 가능하다. 서양의 언어, 서양의 노래, 서양의 예배 신학으로 드리는 예배는 한국인이 드리는 예배가 아니다. 서양인이 드리는 예배를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다. 기독교 전통과 한국 문화가 깊이 만나는 예배, 한국 문화로 표현되는 예배가 바로 “한국인이 드리는 예배”이다. 그래서 한국인이 드리는 예배에서는 한국찬송가를 불러야 한다. 조기연은 「예배갱신의 신학과 실제」에서 이렇게 주장하였다.

전통은 예배의 우주성을 확보해 주며 문화는 예배의 다양성을 제공해 준다. 만일 예배가 전통을 상실하게 된다면 그 예배는 기독교 예배로서의 정체감을 상실하게 될 것이며, 그렇다고 문화를 도외시할 때는 그 예배가 회중에게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하는 예배가 될 수밖에 없다. 전통과 문화, 이 두 가지를 잘 조화시킨 예배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모습의 예배라고 할 수 있다.

 

3.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맛보는 축제의 사건

박근원은 예배가 축제의 사건이라고 주장하였다. “예배는 본래 부활의 축제였다. 초대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는 의식으로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런 축제적인 예배의 성격이 오랜 역사를 통해서 ‘의식’이 되고 ‘예전’화 되면서 원래의 역동적인 성격이 희석되거나 퇴색되어버린 셈이다.” 조기연은 “기독교 예배의 출발은 안식 후 첫날에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며 제자들이 모여서 떡을 떼었던 데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인식하자. 그들에게 예배는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장이요,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맛보는 자리였다. 이러한 기쁨과 감격과 대망의 축제가 바로 오늘 한국 교회의 예배가 되어야 한다.” 고 하였다.

두 예배학자의 주장을 종합하면, 예배는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맛보는 축제의 사건이다. 예배는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사건이기 때문에 축제의 사건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는 사건이기 때문에 축제의 사건이다. 축제는 억지로 할 수 없다. 마음이 움직여야 가능하다. 히브리인들은 바빌론 포로지에서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우리가 바빌론의 강변 곳곳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면서 울었다. 그 강변 버드나무 가지에 우리의 수금을 걸어 두었더니, 우리를 사로잡아 온 자들이 거기에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고, 우리를 억압한 자들이 저희들 흥을 돋우어 주기를 요구하며, 시온의 노래 한 가락을 저희들을 위해 불러 보라고 하는구나. 우리가 어찌 남의 나라 땅에서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으랴. (시편 137:1-4)

히브리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기쁨의 노래를 불렀다.

주께서 시온에서 잡혀간 포로를 시온으로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을 꾸는 사람들 같았다. 그 때에 우리의 입은 웃음으로 가득 찼고, 우리의 혀는 찬양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시편 126:1-2)

서양인의 언어로, 서양인의 노래로, 서양인의 고백으로 드리는 예배의 자리에서는 축제가 일어날 수 없다. 그것은 내가 없는 식민지 예배이기 때문이다. 사대주의에서 벗어나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면서 하느님이 주신 한국인의 언어로, 한국인의 노래로, 한국인의 고백으로 드리는 예배가 “한국인이 드리는 예배”이다. 내가 한국인임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맛보는 축제의 사건이 바로 “한국인이 드리는 예배”이다. 그래서 한국인이 드리는 예배에서는 한국찬송가를 불러야 한다. 성실교회 목사이고, 성실예배교육문화원 대표인 이정훈은 「한국의 그리스도인을 위한 절기예배 이야기」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나는 문득 축제가 사라진 오늘 우리 교회를 생각했다. 사람은 잔뜩 남아 있는데 축제가 사라졌다. 아니나 다를까, 젊은이들이 하나, 둘, 교회를 떠난다고 한다. 축제가 없어서 떠나는 젊은이들…!

 

Ⅱ. 한국인이 드리는 예배로의 예배 갱신

1. 예배유형

박근원은 예배유형을 예루살렘의 예배 유형, 콘스탄티노플의 예배 유형, 로마의 예배 유형, 종교개혁적 예배 유형(루터, 츠빙글리, 부처, 칼빈, 존 녹스)으로 나누고 있다. 예루살렘의 예배유형은 말씀의 예전과 다락방의 예전으로 이루어진 예배유형이다. 말씀의 예전에는 성서봉독, 권면, 기도, 시편과 찬양의 순서가 있고, 다락방의 예전에는 인사, 봉헌, 성별의 기도, 분병례, 성만찬에의 참여, 폐회 등의 순서가 있다. “성만찬에는 두 가지 기원이 있다. 하나는 초기 유대교-기독교 공동체의 즐거운 교제로서의 식사가 그것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기념으로서의 식사를 말한다.” 한국문화에 익숙한 성만찬은 전자이다. 한국인들은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즐겼다. 한국인이 드리는 예배에서의 성만찬은 공동체의 즐거운 교제로서의 식사라는 성만찬의 전통을 계승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성찬식은 너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슬픔에 치우쳐 있다. 함께 먹고 마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맛보는 성찬식의 회복이 필요하다. 메시야적 잔치인 공동식사, 하느님 나라의 잔치인 공동식사로서의 성만찬 전통의 회복이 필요하다.

2. 예배표현

한국인이 드리는 예배에서 한국문화에 익숙한 예배표현들이 도입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징울림이다. 한국인들은 징이 울리면, 시작하는 느낌을 갖는다. 한국인이 드리는 예배에서 징울림을 기원과 연결시킬 수 있다. 조기연은 예배는 우주적 성격이라고 하였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자연 세계가 예배 참여자들과 함께 만나 상통과 합일을 이루는 우주적 사건이라고 하였다. 한국의 전통사상에서 우주 공동체를 삼재(三才)로 표현한다. 삼재는 천(天), 지(地), 인(人)이다. 모든 우주 세계가 예배에 함께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첫 번째 징울림은 하늘이 하느님을 부르는 소리, 두 번째 징울림은 땅이 하느님을 부르는 소리, 세 번째 징울림은 사람이 하느님을 부르는 소리를 나타내는 것도 모든 우주가 함께 예배를 드린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둘째, 말씀 나누기이다. 전통적인 예배에서 설교는 일방적인 선포이다. 그래서 회중은 구경꾼이 되어버려서 귀를 닫기도 한다. 한국의 판소리는 구경꾼이 없다. 소리를 하는 소리꾼과 청중이 함께 분위기를 만들어 간다. 취임새를 통하여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무언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것은 소리꾼과 청중이 서로에 대하여 마음을 열 때에 가능하다. 말씀 나누기는 일방적 선포가 아니라. 서로 의사를 나눈다는 면에서 한국 문화에 익숙한 예배 표현이다. 셋째, 몸으로 드리는 찬양이다. 전통적인 교회 예배에서 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축제성보다 엄숙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제의에서는 춤이 있었다. 그래서 몸으로 드리는 찬양은 한국 문화에 매우 익숙한 예배 표현이다. 하느님께 내 몸을 산 제물로 드린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는 예배 표현이다. 한국교회 예배는 너무 정적이다. 예배는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이다. 기쁨의 자리이다. 기쁘면, 몸이 움직인다. 그것이 춤이다. 한국인의 영성이 담긴 춤을 더욱 더 발전시키면, 우주 모든 만물이 하느님과 함께 생명과 평화의 춤을 추는 기쁨과 축제의 예배가 가능할 것이다. 넷째, 한국악기와 서양 악기가 조화를 이룬 예배 반주이다. 한국 악기 중에서 타악기 보다는 피아노와 잘 어울리는 피리나, 해금을 예배반주 악기로 사용하면 동양과 서양의 모든 악기가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어, 우주를 지으신 하느님을 하느님 되게 하는 예배가 될 것이다.

3. 예배구성

미래사회에서 세계적으로 절실한 영성이 있다. 첫째, 미래 사회에서 절실한 영성은 하느님 나라의 영성, 나눔의 영성-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이다. 20세기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갈등의 역사였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이념의 대립은 수많은 하느님의 생명을 죽이는 죽임의 놀이였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갈등을 극복하는 제3의 길은 하느님 나라의 영성, 나눔의 영성이다. 이 나눔의 영성은 한국인의 영성이요, 십자가에서 피와 살을 나눈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이다. 이 나눔의 영성의 물결이 밀려올 때, 우리는 평화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둘째, 미래 사회에서 절실한 영성은 생태적 민주주주의의 영성, 살림의 영성- 성령의 영성이다. 20세기는 자연과 인간이 갈등한 역사였다. 자연과 인간의 대립은 지구를 죽이는 죽임의 놀이였다. 자연과 인간의 갈등을 극복하는 제3의 길은 생태적 민주주의의 영성, 살림의 영성이다. 이 살림의 영성은 한국인의 영성이요, 우주를 창조하고 모든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영성이다. 이 살림의 영성의 물결이 밀려올 때, 우리는 생명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셋째, 미래 사회에서 절실한 영성은 신명의 영성, 어울림의 영성- 하느님의 영성이다. 20세기는 성, 인종, 지역, 세대, 이념의 갈등의 역사였다. 여성과 남성, 신세대와 기성세대, 전라도와 경상도, 북한과 남한, 동양과 서양의 대립은 인류의 행복을 죽이는 죽임의 놀이였다. 이어령 교수는 「그래도 바람개비는 돈다」라는 책에서 한국 문화의 원형을 仁의 문화라고 주장하면서 “사람(人)이 둘(二)이지만 하나로 어울리는 仁의 문화가 미래를 지배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성과 세대와 지역과 인종의 갈등을 극복하는 제3의 길은 하느님(一)과 사람(人)과 자연(一)이 하나로 어울리는 신명의 영성, 어울림의 영성이다. 이 어울림의 영성은 한국인의 영성이요, 인간과 어울리기 위해 성육신하신 하느님의 영성이다. 이 어울림의 영성의 물결이 밀려올 때에 우리는 신명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미래사회에서 세계적으로 절실한 세 가지 영성을 가지고 한국인의 영성과 축제가 벌어지는 마당의 개념으로 예배를 구성하는 것은 한국인이 드리는 예배에 잘 어울리는 예배구성이다. 예배를 어울림의 마당 - 살림의 마당 - 나눔의 마당, 세 마당으로 나누어서 어울림의 마당에는 개회의 예전의 내용을, 살림의 마당에는 말씀의 예전의 내용을, 나눔의 마당에는 성만찬과 파송의 예전의 내용을 담으면 한국인이 드리는 예배로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천진 목사는 1961년에 이찬식 목사의 3남으로 제주도에서 출생하였다. 감리교신학대학교와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는 이화여대병설 미디어고등학교 교목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토착화신학과 한국전통음악이론에 비추어 본 한국교회 찬송가에 대한 비판”이라는 논문을 통하여 한국찬송가의 신학화 작업을 시작하였고, 한국찬송가공회 음악전문위원, 한국찬송가 위원회 위원, 한국예배음악연구소 소장으로서 한국찬송가 작곡과 이론화 작업을 열정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명으로 부르는 우리가락찬송」(도서출판 한생명, 1999)이 있으며, 「성령의 바람」이라는 제목으로 우리가락찬송 음반을 냈다. 21세기 찬송가 98장과 203장의 작곡자이다.

출처 : 둥근달
글쓴이 : 둥근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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