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물

[스크랩] 소양 주기철 목사의 생애 / 박용규 교수

elimcy 2012. 11. 20. 17:20

                       

                       소양 주기철 목사의 생애

 

朴 容 奎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마치 첫 3세기 동안 초대교회가 이단과 박해라는 두가지 도전을 받았듯이 개신교 선교 50주년을 맞는 1930년대 한국교회는 자유주의와 신사참배 두가지 큰 도전에 직면했다. 하나는 내부로부터 오는 도전이었고, 다른 하나는 외부로부터 오는 도전이었다. 성경의 권위를 평가절하시키고 신학과 신앙을 시대의 조류에 조정하려는 유럽과 북미의 자유주의 세력과 마찬가지로 1930년대 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장로교 내 진보주의자들은 구학파 전통에 선 복음주의 선교사들이 과거 50여년 동안 의 한국교회를 “정통주의로 통조림된 교회”라고 매도하며 장로교 구학파 전통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1930년대 한국교회가 직면한 외부로부터의 도전은 신사참배 강요였다. 획일화시키긴 한계가 있지만, 기독교 2천년의 역사, 특히 초대교회 박해사가 보여주듯이 하나님의 유일신 신앙을 위협하고 협박하는 황제숭배의 도전 앞에서 교회는 황제숭배를 한 사람, 마지 못해 타협한 사람들, 끝까지 숭배를 거부한 사람들 세가지 모습을 보여주었다. 1930년대 한국교회를 소용돌이로 몰아 넣어 한국의 교회를 말살하려는 일제의 신사참배가 강요되자 똑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일제가 조직적으로 신사참배거부를 방해하고, 친일세력들을 침투시켜 회유와 압력으로 신사참배운동을 전개하자 처음,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사람들도 신사참배가 우상숭배가 아니라 제국에 대한 예의에 불과하다는 일제의 입장을 받아들이기에 이른 것이다.

1930년대, 자유주의 도전과 신사참배라는 두가지 도전으로 기로에 선 한국교회의 신앙을 지켜주고 삶을 통해 그 진실을 전달한 인물이 바로 소양 주기철 목사였다. 소양의 가장 활기찬 목회사역은 1930년대에 이루어졌고, 이쩌면 그는 이 1930년대 암훌한 조국의 기독교를 위해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인물이다. 그는 실로 하나님 앞에서 신앙의 충정을 삶으로 진실되게 밝혀준 살아 있는 믿음의 표상이었고, 진리가 결국 승리할 것을 확신하고 시대를 바라 본 선각자였다.

우리는 소양 주기철 목사의 긴 생애 속에서 일관된 신앙의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주기철목사의 경우 그의 생애는 그가 일관되게 지켜왔던 신앙과 별개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가 추구해 온 신앙의 형태를 동시에 고찰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본 소고에서는 주기철 목사의 생애를 성장배경, 회심과 준비, 목회사역, 순교, 그리고 역사적 교훈으로 대별하여 고찰하려고 한다.

I. 성장배경

 

주기철의 신앙과 생애는 그가 성장했던 가정의 배경, 그가 처해있던 시대적 배경, 그가 받았던 신학교육의 배경, 그리고 그가 헌신했던 목회사역 속에서 형성되었던 것이다. 소양, 주기철은 1897년, 한국 찬탈이 노골화되던 19세기 말, 경상남도 창원군 웅읍면 북부리에서 주현성장로와 조재선의 넷째아들로 태어나 일제의 패망을 1년여 앞둔 1944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전 생애(1897-1944)는 우연히도 일제의 한국지배의 역사와 맞물려 있다.

기철의 어린 시절의 이름은 기복이었다. 그는 어릴때부터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아버지 주현성은 훗날 보수주의로 정평이 난 경남노회 소속 웅천 북부리 교회의 장로였으며, 자녀들을 철저하게 신앙으로 교육시켰다. 엄격한 경남노회의 신학적 분위기와 아버지 주현성 장로의 신앙교육은 어린시절 소양의 신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소양은 9살 나던해 자신의 일가 주기효가 1906년에 설립한 7년제 개통학교에 입학해 김창환, 유수성, 이규설 같은 이들에게서 교육을 받으면서 민족애와 반일사상을 접하기 시작했다. 그는 개통학교 5학년때인 1910년 12월 25일 웅천교회에 입교했다. 한국근대사에 있어서 이시기는 암흑이 엇갈리는 시대였다. 종교적으로는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과 독노회설립으로 한국교회가 성장과 교회의 틀을 동시에 다져가던 시대였으나 정치적으로는 한일합방으로 우리 민족이 엄청난 수난을 겪었던 해이기도 하다. 소양은 전국교회를 휩쓸었던 대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애가 강한 개통학교의 교사로부터 민족주의를 접하면서 감수성 많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런 반일감정과 민족애가 소양의 사고 속에서 하나의 체계로 정립되기 시작한 것은 오산학교에서였다. 그가 오산학교로의 진학을 결정하게 된데는 오산학교의 학문적 분위기 때문이었다. 개통학교를 졸업하던 1912년, 당시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춘원 이광수가 전국 순회강연차 마산으로 가는 길에 웅천에 들려 “기독교적 정신을 바탕으로 한 애국과 민족주의의 교육 이념으로 민족의 내일을 설계하는 대망의 열혈 청년들이 운집해 온다”며 오산학교를 소개하자 마침 상급학교 진학을 결정하지 못한 소양은 오산학교의 진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소양은 자신의 이름을 기복에서 기철로 바꾸고 자신의 호를 여강(麗崗)이라 불렀다.

1913년에 종형 주기용과 함께 오산학교에 입학한 소양은 오산의 민족주의 분위기, 특히 남강 이승훈 선생, 유영모선생, 조만식선생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민족주의에 기초한 진정한 민족교육, 밀어 닥치는 일본자본에 맞서 거대 민족재벌을 육성해야 한다는 민족 산업 육성책과 더불어 신민회를 통한 민족 에너지의 결집을 주창해온 이승훈선생, 민족애을 철저한 극기와 금욕기상으로 소화시킨 유영모선생, 그리고 “기독교와 경제, 이 두 동력에 의한 민족갱생”을 꿈꾸며 통시적인 역사 안목에 근거한 민족사를 제시한 조만식선생은 의식 있는 오산의 젊은이들이게 강한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주기철도 예외가 아니었다. 소양과 같은 반에는 미국에 건너가 농장을 한 김주항, 고려대학건물을 설계한 건축가 박동진, 남강의 둘째 아들 이택호가 있었고, 한학년 위에는 외과의사 백인제가 있었다. 소양이 오산에서 교육받던 1913년 봄부터 1916년 3월까지는 일제가 합일합방의 원래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기던 시기인지라 오산에서의 민족주의 교육은 소양에게 더욱 강한 호소력을 지녔다. 일본의 국내 개입이 심상치 않을 것임을 예견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일본의 경제적 정치적 침략이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 그리고 급기야는 1910년의 한일합방이라는 민족적 비운으로 이어지고, 그 여파로 이렇게까지 이 민족이 신음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일제의 한국지배는 소양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이 그의 생애의 한 방향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급작스럽게 달라지는 국내의 정치 경제 사회의 변화, 일제의 노골적인 조선의 침략, 그리고 국내의 경제적 파탄을 목도하면서 소양은 어떤 형태로던 이 시대의 지도자로 부름 받았다는 소명의식을 강하게 자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II. 회심과 준비

 

그러나 이 모든 것 보다도 더 결정적으로 소양의 생애와 신앙을 지배하게 된 원동력은 그의 회심과 평양신학교에서의 보수주의 신학교육이었다. 소양은 1916년 3월 23일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하였으나 채 1년도 되지 않아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투철한 산업정신과 경제입국의 이상에 민족구원이 있다”고 확신한 오산의 이승훈선생과 조만식 선생의 영향을 받아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했던 소양은 1년도 채되지 않아 연희를 떠나고 말았다. 이유는 지병인 안질 로 알려졌으나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희 상과가 그에게 적성이 맞았던 것도, 그렇다고 연희에서의 교육이 소양에게 그렇게 호소력이 있거나 매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1916년 말 고향에 돌아온 소양은 평양신학교 입학할때까지 4년반을 곰내에서 보냈다. 그가 곰내에 머물고 있는 그기간 동안 국내는 일본자본의 침투와 반사회적 정책으로 엄청난 사회경제적 변혁이 진행되고 있었다.

일본자본의 침투는 한국의 전근대적 경제구조의 몰락을 재촉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상품의 홍수에 눈뜬 전에 없던 소비자세, 그런 데에 미치지 못하는 이들의 충족되지 못한 반 사회적 발산 등이 팽배하였다.

또한 물가고에 따른 아녀자들의 직장 진출, 그로 인한 전통적 한국 가족제도의 동요, 취업지망 청년남녀의 수평이동, 농촌인구의 계속적 격감, 이런 여러 현상은 근대산업사회에로의 변신을 이 사회에 강요하면서 사회혼란을 가속화시키고 있었다. ... 더구나 450만명에 이르는 소작인들의 생활은 기아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무직과 기아, 추위, 고물가로 사망한 사람의 수가 상당히 많았다... 생활의 빈핍화로 해외로 나가는 이민의 수도 1918년 간도에만 1만 5000여명에 이르고 있었다.

거기다 일제의 반사회적 정책 강행도 우리 민족에게는 전례없는 비참을 안겨다 주었다. 1916년 조선 총독부는 ‘유곽업 창기취제’ 규정을 발표하여 공창제를 실시, 서울에만도 50만불을 들여 홍등가를 설치하여 한국 청소년들의 도덕적 해체작업을 시작하였다. 더구나 1918년에는 총독부의 공식 예산 18만 2000불을 아편재배 항목으로 배정해서 이를 전매하게 하는 범죄적 행위를 불사하였다. 주초의 총독 세입은 한때 전 세입의 30%를 차지할 정도였다. 총독부가 공금으로 공창, 마약, 주초를 확대공급 전매하여 이사회의 병폐화를 가속화시켰으니 식민정치의 죄악성치고 이 이상의 것이 다시 없을 것이다.

이런 암울한 조국의 현실, 그로인한 미래에 대한 불확실, 더구나 일생동안 괴롭혔고, 학업마저 중단하게 만들었던 안질로 인한 육체적 고통으로 소양은 연희를 떠난 후 긴 세월을 좌절의 늪 속에 헤매야 했다. 결단과 변화가 요청되는 그런 상황에서 돌파구를 찾기위해 오상근과 함께 고향청년들의 교육을 위해 교남학회를 만들었으나 그가 직면한 시대상과 그가 만난 육체적 고통으로 별반 결실을 거둘 수 없었다. 자신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방황하고 있으면서도 교회 생활만은 충실하였다. 1918년부터 웅천읍교회 집사가 된 소양은 종종 주일 날에 설교도 하고, 교회를 청소하고, 주일학교 중책도 맡아 교회 일을 담당하며 이기선 목사의 목회를 도왔다. 이 기간이 한편으로는 방황의 기간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연단과 훈련의 기간이었다.

바로 그시절, 3.1.운동을 1년 앞둔 1918년 21살의 소양은 서울정신학교를 졸업한 3살 연하의 김해의 규수 안갑수(1900-1933)와 결혼했다. “모범적인 신앙의 어머니 밑에서 자라난 정열적인 여인” 안갑수는 한 남편의 출실한 내조자요, 한국교회 목회자 아내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보여준 한 가정의 충실한 아내였다. 민경배 교수에 따르면 안갑수는 “조용히 아이들을 키우고 뒤에 숨어 전면에 나타나기를 삼가면서 여인으로서의 환회도 당시 여성들의 한계보다 더 깊이 제한하고 은폐시키며, 그러다가 병약에 시달리고 말없이 조용히 무대에서 사라져 간 목사 부인의 생애, 그것을 그대로 한편의 시처럼 남기고 간” 당대의 여인이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증언은 사모가 “성격이 활달하고, 외향적이며, 말수가 굉장히 빠르고” “인정과 감정이 풍부”했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를 등에 엎고 심방”하는가 하면, 설교후에 강평도 주저하지 않는 깨어 있는 목회자 아내, 그러면서도 여필종부에 출실했던 한 지아비의 아내였다. 때문에 활달하면서도 희생적인 한 아내 안갑수와의 결혼으로 소양은 적지 않은 심리적 안정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1. 성직에로의 결심

 

수년 동안의 방황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어린시절부터 받은 가정의 엄격한 신앙교육과 북부리 교회의 보수적인 분위기에 깊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런 신앙의 색갈은 일생동안 소양의 삶을 특징지워주었다. 1918년 김장호가 지금까지 구학파 전통의 한국 보수주의 전통에 반기를 들며 성경에 나타난 이적과 기적들을 모두 부인하고 심지어 부활과 재림마저 부인하는 극단의 현상을 보이자 이를 목격한 한국교회는 이제 서구에서 진행된 현대주의 도전이 남의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국내의 신학적 흐름을 소양이 모르고 있을리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런 조국의 변천과 도전을 보면서 그는 신앙의 순수성 보존이야 말로 한국교회의 사활이 걸린 문제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자연히 소양에게 영향을 준 인물도 그런 전통에 선 장로교 지도자들이었다. 그중에서 성서중심의 보수주의 신앙을 외쳤던 이기선과 성령의 놀라운 각성과 체험을 통한 치유의 사역의 주인공 김익두는 소양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김익두는 1920년 전국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니며 하늘로부터 내리우는 성령의 뜨거운 불길로 전국을 성령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 앉은 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말을 알아듣고 벙어리가 말을 하고 불치의 병이 치유받는 놀라운 이적이 집회때 마다 비일 비재하게 일어났다. 이것을 체험하고 목격한 황해노회가 1923년 총회에 “금일에는 이적 행하는 권능이 정지되었느니라”란 장로회 헌법 제 3장 1조의 수정을 건의할 정도였으니 김익두의 집회에 얼마나 이적이 일어났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한국의 진보주의 신학을 대변하는 김재준과 한국 정통신학의 대부 박형룡이 예수를 영접한 것도 김익두 집회에 참석하고서였다.

소양은 김재준이 김익두로부터 은혜를 받은 1920년, 그해 5월 27일 마산의 문창교회에서 열린 부흥사경회에 참석해 깊은 영적 각성을 체험했다. 친구 지수광, 배익조, 이약신과 함께 참석한 이집회에서 소양은 김익두목사의 “성신을 받으라”는 설교가 있은후 과거의 죄에 대한 통회, “성령의 강력한 임재,” “지금까지 맛보지 못한 영적” 각성을 체험한 것이다. 그해 11월 1일부터 웅천읍교회에서 열린 사경회에서 또 다시 “큰 은혜”를 받은 후 소양의 인생관은 완전히 달라졌다. 웨슬리가 올더스게이트가에 한 모라비안 교도들의 집회에 참석해 영적 각성을 체험한후 그의 일생이 완전히 바뀐것처럼, 소양도 김익두의 집회에 참석해 놀라운 영적 각성 체험 후 주의 종으로 일생을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다. 이것으로 연희에서의 학업 중단후 소양의 “4년반의 긴 좌절과 방황”은 완전히 끝이 났다. 이듬해 1921년 12월 13일 문창교회에서 회집된 경남노회 제 12회 정기노회때 소양은 주정택, 홍수원, 강상은과 나란히 신학교 입학 시취를 통과하고, 1922년 3월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다.

 

2. 평양신학교 시절

 

애초 연희로 진학하겠다던 소양의 결심은 소양의 신앙적 성향이나 영적 배경과는 맞지 않았다. 연희에서의 갈등과는 달리 평양신학교에서의 신학교육은 소양에게 만족과 기쁨을 동시에 가져다 주었다. 그가 입학하던 1922년 평양신학교는 국내의 가장 크고 훌륭한 교수진을 갖춘 신학교로 새롭게 단장하고, 교과과정도 재편했다.

1901년에 시작된 평양신학교는 1922년부터 신학과정을 3년과정으로 개편하고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신학교육을 실시했던 것이다. 구태여 “평양신학교는 주목사 재학시대가 황금시대”였다는 김인서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고 당시 평양신학교는 단일신학교로는 국내에서 가장 훌륭한 교수진을 갖추고 있었고, 재학생수도 제법 “세계적 수준”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평신은 북장로교, 남장로교, 호주장로교, 그리고 카나다 장로교등 4개의 장로교 선교회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신학교였고, 따라서 교수진이 각 선교회에서 파송한 우수한 선교사들로 구성되어 있어 가히 수준급이었다. 공관복음을 강의한 나부열박사, 구약학을 강의한 어도만박사, 역사신학을 강의한 부두일박사와 업아력박사, 고전어를 강의한 왕길지박사, 교장 마포삼열 박사, 조직신학을 강의한 이눌서박사, 실천신학을 강의한 곽안련박사등 교수진 모두가 학문과 인격에 있어서 작금의 어느 신학교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세계적 수준”이었다.

평양신학교는 “일종의 성경훈련학교”라는 비판을 받을 만큼 성경과 실천신학 중심의 커리큘럼으로 짜여져 있었다. 1학년 커리큘럼을 보면 14과목 중 11과목이 성서학과 실천신학 과목이고 2학년 16과목 중 11과목이 그리고 전체 47과목 중 34과목이 성서학과 실천신학 과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성경중심의 신학교육이 당시 소양에게는 연희전문학교 상과에서 수강했던 세속학문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매력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평양신학교에서 신학교육을 받으면서 평신의 훌륭한 교수들의 신앙과 인격에 감화를 받았다. 본래 오산에서의 민족주의 의식이 차원 높은 순수 기독교 민족주의로 승화되어 갔던 것도 이 시기였다. 목회자로로 부름받았다는 강한 소명의식 때문에 소양은 스승 고당 조만식이 자신을 찾아와 교육계 투신을 권유할 때도, 60 노구를 이끌고 남강 이승훈 선생이 장차 오산학교를 맡기겠다며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로의 유학을 권할때도 주저하지 않고 그들의 제의를 거절했던 것이다. 목회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에는 추호도 의심에 여지가 없었다.

정치적인 독립의 소망이 종교적 소망으로 대치되어 이 민족이 진정으로 살길은 복음화되는 길이며, 전 민족이 자신들의 위치에서 기독교적 이상을 몸소 실천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순수 기독교적 민족 이상이 바로 평신학생을 여타 학교의 학생과 구별짓는 것이었다. 소양에게는 늘 이 민족 전체를 염려하는 선각자적 혜안이 있었고, 이런 역사의식은 평신에 있는 동안에도 표출되었다. 소양은 지방 출신별로 기숙사가 따로 구별되어 있는 것이 학교의 화합과 일치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철폐해 줄 것을 학교 측에 건의했다. “지방별로 기숙사에 입사시킬 것이 아니라 각 지방 학생들을 고루고루 섞어 배방을 하면 서로 지방의 특징도 배우고 친목을” 도모하며 결국 “후일 한국 교회는 지방색이 없는 하나의 교회”가 될 것이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누구나 느낄 수 있고 건의 할 수 있는 평범한 일 처럼 보이겠지만 실상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역적인 장벽을 넘어 한국 전체를 바라 보는 역사적 혜안을 가진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소양의 건의가 장로교단과 더 나가 전 한국교회의 장래를 염려하는 한 젊은이의 애교심에서 나온 충정의 표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신학교는 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소양은 주의 종으로서의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고 맡겨진 사역을 충실하게 감당했다. 소양은 평양신학교를 다니면서 1922년 겨울부터 1925년 9월까지 경상남도 양산교회 조사로 성역을 시작했다. 평신에서의 3년 간은 주 중에는 학교에서 신학수업을 받고, 주말에는 평양에서 경산 양산까지 내려가 주일을 지키고 다시 수업을 받기 위해 평양까지 올라 와야하는 고된 훈련의 기간이었다.

 

III. 목회사역

 

앞서 언급했듯이 평양신학교에서의 신학교육은 단순히 학적인 훈련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지나치게 실천적이리라 할 만큼 현장을 강조하는 신학교육이었다. 신학교가 교단과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 신학교육은 생명을 상실한 것이다. 말씀 그대로 확신 있게 외치고, 현장에서 몸으로 실천하는 목회자 양성, 바로 이것이 평양신학교의 교육 목표였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때 장대현 교회에서 처음 시작된 새벽기도가 전국적인 현상으로 발흥하면서, 모든 학생들은 새벽마다 학교 채플에 모여 기도를 했다. 이것은 학교 경건훈련의 커리큘럼에 따른 것이지만, 결코 학생 자신들이 강제성을 띠기 때문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암울한 그 시대, 이 민족의 지도자로 부름 받았다는 소명의식을 자각하고 있던 이들은 민족의 소망이 기독교에 달려 있다는 그 자성의 외침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던 것이다. 평신에서는 민족주의라는 단어나 분위기는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기독교만이 이 민족을 일제의 압제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확신은 평신의 교수들이나 절대다수의 학생들이 갖고 있었다. 100만인 구령 운동이 교파를 초월해 이 시대의 전국교회를 지배하고 있던 그시대 민족의 복음화는 곧 민족의 구원이라는 신념이 팽배했다. 이것으로 조국의 미래에 대한 소양의 오랜 정신적 방황도 완전히 끝난 셈이다.

 

1. 부산 초량교회 목회

 

입학한지 4년만인 1925년 12월 22일 19회로 평신을 졸업한 소양은 그해 12월 30일 경남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초량교회에 부임했다. 그가 초량교회에 부임하던 1925년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종교 전반에 걸쳐 일제의 한국 침략 기간 중 가장 변화 무쌍했던 격동기였다. 반서구, 반 선교사, 반 정통의 기치를 내걸며 친일 기독교를 표방했던 김장호와 이만집의 조선기독교가 설립된 것도, 반서북, 반선교, 반교권의 기치를 내걸고 신흥우가 분파운동, 적극신앙단을 시작한 것도, 총독부가 한국경제를 완전히 찬탈하려 한 것도, 또 한국 젊은이들의 정신적 해체를 목표로 아편 공창 주초를 정책적으로 육성하려는 총독부의 부도덕성이 정점에 달했던 것도, 그리고 156만 4582원이라는 거금과 5년 6개월의 대공사를 거쳐 서울 남산에 거대한 조선신궁을 완성한 것도 바로 1925년이었다. 조선신궁이 건립되던 그해 후대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끝내 순교한 소양의 공식적인 사역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리라. 이것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여 이 민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다.

일제의 대한 파괴 공작 속에 민족의 수치와 아픔이 극에 달하던 바로 그때 소양은 평신에서의 3년간의 신학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역사 깊은 초량교회에 부임한 것이다. 이미 평신 졸업식에서 30명의 졸업생을 대표하여 답사하는 영예을 차지할 정도로재학 시절부터 동료와 교수들로부터 학문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던 소양에게 초량교회 부임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소양의 초량교회 부임은 그가 촉망받는 이 시대의 젊은 지도자라는 사실을 전국 교계에 알리는 신호나 마찬가지였다.

전임자 정덕생 목사의 후임으로 초량교회에 부임한 후 소양에게 부여된 첫번째 과제는 전임자로 말미암아 야기된 교회의 동요를 안정시키고 타교회에 비해 약한 교세를 오랜 역사를 지닌 교회에 걸맞게 성장시키는 일이었다. 소양이 볼때 교회의 안정과 성장을 위해서 초량교회가 먼저 해야 할 일은 교회가 교회로서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교회 개혁은 시급한 요청이었다. 때문에 목회도 이런 방향에 맞추어졌고, 그중에는 “말씀의 진정한 전파” “성례의 신실한 거행” “권징의 정당한 시행”이 깊숙히 자리잡고 있었다.

먼저 전임자 정덕생 목사의 영향으로 남아 있는 정치적 민족주의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정목사는 소양이 부임하기 3년전 70평의 예배당을 신축하여 교회를 단장하기는 했지만 노골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해 교회 안에는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늘 모여들었고, 그결과 정치적인 요소들이 영적인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었다. 이것을 간파한 소양은 성경공부와 기도회 중심으로 교회의 방향을 전환하기 위해 행정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두번째 그가 단행한 것은 교회 재정상의 개혁이었다. 국가 경제의 어려움으로 교회 재정이 압박을 받자 자신의 사례를 하향 조정하고, 부인 안갑수의 재산 논 6000여평을 점차적으로 처분하여 교회재정 일부로 충당하는 등 헌신을 몸소 실천에 옮겼다. 그러나 교회의 재정 압박 속에서도 상회비, 선교비, 신학생 보조금은 삭감하지 않고 계속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소양의 목회 철학이 그 첫 목회지에서 여실히 나타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인으로서의 신앙의 모습을 갖추지 않을 때는 성경과 교회의 원칙을 따라 엄격히 치리하는 등 신앙의 순결을 보존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과감한 결단,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실천적인 신앙,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신앙의 용기, 날마다 자기를 쳐 복종하는 기도의 삶, 성서 중심의 설교, 교회교육, 그리고 행정은 전임자의 목회철학과 달랐고, 그것은 교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원동력이었다. 부임당시 100여명의 교세는 얼마 가지 않아 그 세배, 300명의 교세로 급성장하였다. 이것으로 소양은 교단으로부터 성공적인 목회자로 주목 받기에 충분했다.

소양의 성서적 신앙과 목회는 전임자와 다른 방향에서 교회를 안정시키고, 교회의 지도자들을 배출하게 만들었다.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하던 방계성, 일제하에 초량교회를 끝까지 지켜준 양성봉 목사, 사랑의 원자탄의 주인공 손양원 목사, 한국 보수주의의 탁월한 지도자 이정심 목사도 모두 소양의 신앙과 인격에 깊은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외 전재선 목사, 박손혁 목사, 김석진목사, 노진현목사, 구영기 목사도 소양의 감화와 영향을 받은 지도자들이었다. 이들 모두 소양을 따라 성서적 신앙에 기초한 전통적인 한국 장로교의 순수한 신앙을 계승한 이들로 신사참배와 자유주의 도전 앞에 교회의 순수성 보존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이들이었다.

 

2. 마산 문창교회 목회

 

소양의 초량교회 목회 시절과 관련되 빼 놓을 수 없는 한가지 사건은 1931년 그가 속한 경남노회가 한국교회에서는 처음으로 신사참배 반대안을 결의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소양의 역할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쳤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당시 초량교회가 경남노회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가장 큰 교세를 가지고 있었고, 또 소양이 (당시 성공적이고 모범적인 목회로) 노회에서 절대적인 존경을 받고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볼때 그 일이 성사되기까지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리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교회에서 뿐 아니라 노회적인 차원에서 신앙의 순수성과 순결성의 보수는 시대적 사명이고, 일차적인 복음의 명령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철저한 성서적 신앙, 그위에 기초한 목회사역은 초량교회를 사임하고 마산 문창교회에 가서도 계속 이어졌다. 그가 초량교회를 떠나 문창교회로 사역지를 옮긴 이유는 교회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기철 목사가 아니면 마산교회[문창교회]는 치리할 수 없다”는 원로 목사 여러분들의 요청을 받고 “오랫동안 기도하고 생각”한후 “마산교회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문창교회에 부임한후 한 일은 주일학교 교육의 강화, 엄격한 권징의 실천, 이단의 척결, 그리고 면려회 운동의 활성화 등 여러가지였지만 이들 모두는 철저한 성서적 목회철학의 실천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다. 성경대로의 목회는 자연히 보수성을 지닐 수 밖에 없었고, 비 성서적인 요소에 대항하고 그것을 교회에서 척결하는 일에 전투적이도록 만들었다. 사역의 현장만 다를 뿐이지, 바로 이것이 미국 프린스톤의 신약학 교수 메이첸과 그의 친구 북장로교 목사 매카트니가 미국에서 보여주었던 신앙의 모습이었다. 철저한 성경 중심의 신앙, 처녀 탄생이나 축자영감과 같은 전통교리에 대한 확신, 철저한 칼빈주의 신앙, 그리고 신앙의 행동화는 여러가지 면에서 이들과 유사했다. 카톨릭이 기독교의 변형인지 몰라도 현대주의는 그 출발 전제가 다르기 때문에 기독교가 아니라고 선언했던 점에서도 메이첸과 소양, 이 둘은 유사한데가 있었다.

1931년 6월 문창교회에 부임한 소양은 교회 안에 일고 있는 이단적인 세력들을 척격하는 것이 그 교회를 살리는 지름길이라고 확신하고 이일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1930년대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이 주도하던 교단의 흐름과 신학적 지도력이 한국인들에게 전이되면서 전에 없는 혼란을 맞았다. 구 학파 전통의 평양신학교의 보수성에 반기를 든 신흥우, 또한 이용도, 백남주, 황국주, 박계주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추구하는 원산신학산파의 신비주의 세력, 반선교사와 반교권을 외치며 기성교회를 비판하던 김교신으로 대표되는 무교회주의, 그리고 한국의 장로교를 “정통으로 통조림된 교회”라고 외치며 반정통주의 기치를 내걸었던 진보주의 세력, 이 모두가 한국교회를 위협하던 것도 바로 이 즈음이었다. 시간이 흐를 수록 이들의 영향은 커지고 그만큼 이들에게 미혹되는 자들의 수도 증가되고 있었다. 남쪽에는 주로 무교회주의가 판을 치고 있었고, 북 쪽에는 신비주의 운동이 교회의 정통신앙을 뒤 흔들고 있었다.

 

... 南朝鮮地方으로는 무교파[회]주의의 신자들이 기성교회를 훼방하야, 신성치 못하다. 혹은 形骸(형해)만 가진 교회라고 선전하야 신자들을 유혹한다. 그래서 튼튼한 터에 신앙의 뿌리를 박지 못한 자들은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바람부는 대로 기우러지는 경향이오, 西北으로는 黃國柱 일파와, 元山의 소위 女先知를 중심한 일파와, 평양의 이용도를 중심한 기도단의 일파라 하겠다. .....

우리는 이제 이 무리들을 “이세벨”의 당’이라고 하고 싶다.

 

정통교회의 신앙을 위협하는 이와 같은 이설이 전국적인 현상일진대 경남노회도 그 영향권에서 벗어 날 수 없었다. 드디어 경남노회 안에서도 그로 인하여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대담한 신신학”을 표방하던 경남노회의 대지교회의 조사 김형윤이 1935년 최태용과 함께 복음교회를 창립한 무교회주의자 백남용을 초정하여 신학강연을 한 것이다. 백남용은 일본에 유학하는 동안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고 함석헌, 김교신과 함께 무교회주의를 확산시키며 장로교에 상당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던 인물이다. 이곳에 초빙받은 백남용은 “예수는 육(肉)이다. 그러나 이 육은 하늘에서 내려온 육이다”며 “소위 순육설(純肉說)”을 주창하였고, 또한 “현대인이 성신의 은사를 받아서 글을 쓴다면 그것도 성경이다”며 특별 계시의 종결성을 거부하였으며 “십계명은 불필요한 것이다”며 “십계명 무용설”마져 생명 내걸고 외쳐댔다. 백남용이 설파한 진리는 한 두가지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가르침은 정통교회가 지난 2천년동안 소중하게 여겨 온 양성 교리에 배치되는 것이며, 성경으로 특별계시는 종결되었다는 정통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일대 도전이며, 구약의 계명을 파기하는 율법파기주의(antinomianism)의 한 전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것은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교회사에 무지한 자들이 흔히 드러내는 이설(異說) 중의 이설이다. 이런 백남용의 이단성을 간판한 박형룡은 1933년도 신학지남에서 백남용의 가르침은 “조선기독교 장로회에는 결코 용서하지 못할 이단”이며, 서양의 낡은 이단에 불과하다고 지적하였다.

1932년 9월 총회에서 노회장 주기철이 경남노회를 대표해 “본 노회 경내에서는 백남용씨가 창도한 예수 순육설(순육설)이 유행하여 거기 감염된 전도사와 교인들이 있어 교회가 다소 어지러운 중에 있아오며”라고 보고할 정도였다면, 백남용의 가르침이 경남노회 뿐만 아니라 전국 교회에 적지 않은 파문을 안겨준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단의 위협 속에 교회의 순수성을 보존할 필요를 절감한 소양은 1933년 7월 박형룡박사를 초청하여 신학수양회를 열었던 것이다. 길선주와 동갑내기 박형룡은 프린스톤과 남침례회신학교에서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평양신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전국교회에 유망한 젊은 교수로 인정을 받고 있던 차였다. 박형룡박사의 엄격한 정통주의 신앙은 주기철과 맥을 같이하고 있었고, 두 사람 모두 이단 사설이나 자유주의 신앙에 대해서는 냉혹하리 만큼 가차 없었다. “금년(1933) 7月에 본 노회 주최로 신학교 교수 박형룡 박사를 청하여 특별히 교리에 대한 문제로 일주일간 수양회를 하엿사오며”라는 경남노회의 보고는 세가지 사실 즉 박형룡박사가 적격자로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 그를 초빙한 것이 교리적인 이유라는 사실, 그리고 그의 초빙이 노회적인 차원에서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단에 빠진이들에게 이단의 길을 걷고 있다고 일깨워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교회가 그들을 일깨우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영향력을 극소화하기 위해 가부간의 분명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엄격한 권징의 실천은 한 교회의 영역에서만 아니라 노회적인 차원에서도 불가피한 일이었다. 1933년 7월 3일, “이단에 감염된 전도사와 교인들이” “누누히 로회로서 권유하였으나 종시 듯지 안코 점점 악화”되자 경남노회는 감염 경중에 따라 10여명 이상을 “출교”하거나 “면직 책벌”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성서적 신앙에 뿌리를 둔 주기철 목사의 목회 철학에서 볼때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양은 교회도 그런 방향에서 엄격하게 다스렸다. 얼마전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한 소양이 전혀 개인적 슬픔에 침잠되거나 몰입되지 않고 대도를 걸으며 바른 신앙 바른 교회를 구현하고 있었다는 것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책벌 받은 이들이나 또 이들과 신앙적 색갈을 같이하는 무리들은 자신들이 “制度 否認者”도, “무교회주의자도” “성서의 권위를 무시하는 자도” “불건전한 神秘主義者도” 교리상으로 전혀 “異端者”도 아니며 또한 조선교회를 파괴하고자 하는 야심도 없고, 다만 “신약성서적 산 신앙을 재인식코저 하는 자들”이라고 변호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실제 주기철 목사가 문창교회를 담임하면서 실천에 옮겼던 목회철학, 그것은 “성서와 신앙 정통성 확인의 목회”였다. 이단에 대해 추호도 양보할 수 없을 만큼 확고했던 소양은 홀이라도 이단 사상과 현대주의에 물든 교인들이 있을까 노심초사했던 것이다. 성경대로의 신앙을 떠난 사람들을 바로 세우는 일이 그에게 맡겨진 시대적 사명이자 그에게 부여된 거룩한 소명이었다.

 

3. 불의를 향한 예언자적 항거

 

왜 소양이 생명을 내걸고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섰는가하는 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한 것은 한일합방과 더불어서다. 그러나 신사참배 강요가 정치적 차원에서 구조적으로 확립된 것은 1931년 6월 만주사변이 발생하고부터였다. 이미 일제의 깊은 의도를 언론들은 간파하고 있었다. “혹은 거울로 혹은 구술로 혹은 칼로 ...모양을 만들어 모셔두고 신이 여기에 있다하여 이에 대하여 숭배하며 또는 기도함은 모두 우상숭배”라며 일본의 신사참배참배 강요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으로 정간을 당한 동아일보는 속간하자 1925년 3월 18일 사설에서 신사참배 강요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신사에 대하여 일본인이 “숭고한 경의를 표하는 것은 일본민족이란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일본인만 위하는 신사에 대하여 일본인 이외에 민족이 일본인과 같은 감정으로 신사 존중하기를 바라지 못할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동아일보의 사설은 신사가 일본 사람들의 문제지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 또한 그것은 국민의례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라는 일반인의 의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누누히 신사가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고 단지 예식에 불고하다는 변명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사람은 없었다. 따라서 동아일보는 신사참배가 단지 국가에 대한 예식에 불과하다는 일본의 주장을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일제의 검열과 통제아래 언제나 폐간의 위협을 받고 있는 언론으로서는 국민의 힘을 하나로 결집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 민족 굴종과 압박, 그리고 착취의 이데올로기적 무기로 등장”한 신사참배를 “민족사적 차원에서 대결할 힘과 조직이 한국을 통틀어서 교회 밖에 따로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소양의 역사 무대의 등장은 시대적 소명이었다. 1932년 9월 17일 일제가 평양의 “만주출정용사 위령제”에 미션스쿨 전 학생들이 참배할 것을 지시한 사건, 그것도 장로교 총회가 평양에서 회집되는 바로 그시기에 지시한 사건이 발생하자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라고 확신하던 총회는 “기독교 학교 생도는 他宗敎式典에 참열함을 不許”한다는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총회적인 차원에서 신사참배 문제를 논하기 위해 총회는 1935년 정인과, 염봉남, 이인식, 장규명 ,관신근, 이학봉, 오천영을 위원으로 한 연구위원을 임명하였다.

현대주의 도전이 한꺼번에 한국교회를 위협하고 있던 1934년과 1935년 한국교회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두 총회가 열렸다. 자유주의 신학 문제, 아빙돈 성경주석 문제, 적극신앙단 문제, 여권문제, 창세기 저작문제가 한꺼번에 제기되어 총회적인 차원에서 이문제를 숙의하고 결정하였던 것이다. 자연히 이들 현대주의에 대한 총회의 결정은 단호할 수 밖에 없었고,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에 설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강한 총회의 신사참배 반대 결정을 유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신사참배반대의 기치를 분명히 했던) 경남노회였고, 또 그 노회의 결정 이면에는 소양이 깊숙히 자리잡고 있었다. 소양은 적어도 자유주의와 이단과 신사참배의 도전 앞에 한치의 양보나 타협이 없었다. 성서대로의 신앙, 성서가 가르치는 대로의 사역을 통해 암울한 역사적 현실을 넘어 이 조국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직시하려 한 이시대의 지도자였다. 그에게 불의와의 타협은 곧 하나님에 대한 유일신 신앙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한국교회가 이런 역사적 섭리를 거슬러 올라가 타협한다고 해도, 소양만은 결코 그럴수 없었다. 1934년의 설교, <죽음의 준비>는 이런 소양의 신앙적 결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매일 매일 자기를 쳐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 복종하는 것, 불의한 시대에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죽음을 미리 준비하는 것, 조국의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도 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역사적 혜안으로 관조하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진정한 이 시대의 예언자의 모습이리라.

1935년 5월 1일부터 5일까지 약 200여명의 장로교 목사, 선교사들이 일제의 총독정치의 식민화 정책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금강산에서 모였다. 여기서 소양은 <예언자의 권위>라는 설교를 통해 예언자적 혜안을 가지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의 횡포에 항거했다. 구약의 참 선지자들은 불의에 세력 앞에 타협하지 않고 문제들을 고발했던 시대의 선각자들이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황폐를 고발한 구약의 엘리야가 그랬고, “평안하다, 잘되어간다고 집권당국에 아부하는 자”들이 득실 거리는 당대 하나님의 말씀대로 시대를 고발하고 경계했던 예레미야가 그랬으며, “생살여탈의 대권을 잡은 임금 앞에서 그 죄를 책망”했던 세례 요한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기독교 2천년의 역사 속에 불의를 불의라고 외쳤던 일사각오의 신앙인들, 메리 여왕 앞에 굴하지 않았던 존 낙스, 교황청의 압력에 굴종하지 않고 종교개혁을 추진했던 마틴 루터,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제네바에서 신정정치를 실현했던 존 칼빈, 모두 시대에 살면서 시대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시대를 앞서간 예언자들이었다. 일본 천황의 숭배 곧 그것은 배도의 길이며, 망국이라고 외쳤던 주기철의 용기, 그것은 엘리야, 예레미아, 그리고 세례 요한의 용기, 바로 그것이었다. 경계의 태세를 늦추지 않으며, 목사 수양회를 감시하던 임검 경찰관이 “중지”라고 외치자 소양의 설교는 중단되었다. 그러나 소양은 “천황제의 사신 우상성, 그리고 그 국체의 독신성(瀆神性)을 고발하는 하나님의 종의 자세, 거기에 비로소 진실한 목사, 충실한 예언자의 모습이 있다”는 사실을 교계 지도자들과 일경 앞에 천명해 모인이들의 의지를 새롭게 결집시켰다.

그해 소양에게는 가정적으로도 변화가 있었다. 1933년 5월 조강치처 안갑수와의 사별한 소양이 2년후 1935년 11월 우여골절 끝에 그가 시무하던 문창교회 집사로 있던 강직한 여인 오정모와의 재혼한 것이다.

한달후 소양은 평양신학교 사경회 강사로 초빙받아 후배들에게 다시 한번 자신의 순교자의 결단을 담은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1935년 12월 평양장로회신학교 사경회때 한 “일사각오”의 설교는 소양의 예언자적 혜안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설교다. 예수를 따라서의 일사각오, 타인을 위한 일사각오, 부활진리를 위한 일사각오, 그것은 예수 안에서의 죽음이 진정한 생의 출발이며, 부활을 위한 입문임을 선포한 것이다. 예수를 버리는 것이 죽는 길이며, 오히려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이 “정말 사는 것”이며, 죄인을 위해 죽기까지 피흘리시고 자신의 생명을 주신 그 남을 위한 희생, 그것이 바로 이시대 우리가 따라야 할 가르침이다. 죽음 저 너머에 보여주시는 부활의 희망, 바로 그것이 죽기를 두려워해서는 안될 이유였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역설이 그리스도 생애 속에서 살아 있는 진리로 승화되었듯이, 죽음과 그 넘어의 부활이 소양의 전 인격 속에 완전히 하나로 용해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소양은 예수의 말씀 그대로를 자신의 주어진 실존 속에서 행동으로 구현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남을 위한 희생”을 본받아 타인을 위한 일사각오의 신앙구현, 불의의 도전 앞에 순교를 각오하고 외치는 진리의 소리, 그것은 이시대를 찬란하게 여명하는 광야의 소리며, 잠들어 있는 수많은 뭍 영혼들을 각성시켜 하나님의 섭리를 조망하게 만드는 이시대의 나팔이었다.

그의 순교자적 결단의 신앙은 평신의 학생들만 아니라 그곳에 참석한 평신의 교수들, 특히 박형룡에게 엄청난 도전을 주었다. 몇년전 교역자 수양회에서, 다시 평신의 사경회에서 소양의 예언자적 혜안과 순교자적 결단, 탁월한 인격, 그리고 보수 신앙의 뿌리를 재확인한 박형룡은 몇개월후 소양에게 한통의 편지를 발송했다. 그것은 송창근 목사가 사임했으니 후임문제를 상의했으면 좋겠다며 산정현교회 담임목사로의 청빙을 타진하는 편지였다. 1936년 3월 1달간의 일본 순회집회를 마치고 돌아온 소양에게 평신의 박형룡의 편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4. 산정현교회 목회

 

1936년 7월로 불의에 대한 예언자적 항거로 점철된 마산 문창교회에서의 목회를 마감한 소양은 주님의 거룩한 부름을 따라 평양 산정현 교회로 옮겼다. 주어진 사역지에서 생명 내걸고 주의 명령을 준행한 후 주님이 부르시는 곳이라면 아골골짝 빈들이라도 복음들고 가겠다는 것이 소양의 목회철학이었다. 하나님의 강한 주권, 자기의 전생애를 인도하시는 그의 절대적인 섭리 앞에 언제든지 순종하고, 심지어 주를 따라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1905년 모교회 장대현 교회에서 분립 설립된 산정현교회는 주기철 목사를 담임으로 청빙할 즈음에는 30년의 역사를 가진 틀 잡힌 교회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강규찬 목사가 떠난후 송창근 목사가 후임이 되었으나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목회 경험이 없는 것은 차지하고라도 여과되지 않은 그의 직선적인 비판은 소화하기에는 너무 날카로웠다. 당시 교계가 서북 대립으로 갈라선 현실을 안타까워 한 송창근은 “요즘 天下 共知하는 바에 조선교계에는 무슨 黨이 있다, 누구의 派가 있다고 하야 서로 놀여 보고, 못밋업어는 터이요, 게다가 갓흔 조선 사람으로서 南놈 北놈 하야 스사로 갈등을 일삼으니 이 엇지함인가. ... 50년 禧年(희년)인가 50년 噫年(희년)인가”며 개탄했다. 물론 이것이 근거 없는 것도, 교인들에게 직접한 것도 아니고 당대 시대를 한탄하면서 쓴 시론성 글이지만, 그가 어떤 방향에서 목회를 했는가를 암시해주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건축기금 조성을 둘러싸고 당회와 의견이 대립하면서 송창근은 점점 더 신뢰를 잃어갔다. 이 모두가 그의 사역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산정현교회를 떠나야 했던 근본적인 원인은 신학 문제였다. 비록 그가 프린스톤과 덴버에서 수학을 했지만, 일찍이 일본 청산학원에서 받았던 진보적인 신학교육의 뿌리는 어쩔 수 없었다. 같은 시대 송창근과 함께 청산학원을 거친 김재준의 말을 빌린다면 그들이 수학하던 당시 일본 청산학원은 급진적인 미국 뉴욕 유니온 신학교의 출장소라고 할 만큼 자유주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담임 목회 경험이 없었던 송창근이 산정현교회를 담임하면서 그의 목회철학과 설교 또는 그가 기고한 글들에 이런 교육적 배경에서 나온 진보적인 사상이 자연스럽게 노출되었고, 급기야는 그것이 총회적인 차원에서 문제시되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런 산정현교회의 문제점과 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알 고 있던 사람이 박형룡이었다. 그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산정현교회 동사목사로 때로는 임시당회장으로 교회를 섬기며 교회의 형편을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송창근목사가 아빙돈 단권성경주석 번역에 참여하여 총회에서 문제가 되었던 사실도, 그가 감격의 세월이라는 시평을 통해 교회를 신랄하게 비평했던 사실도, 프린스톤에 다녔다고는 하지만 일본의 청산학원의 진보주의 신학에 물들어 있었다는 사실도 잘알고 있었다.

박형룡이 볼때 이런 상황에서 산정현교회를 지켜줄 적격자는 주기철 밖에 없었다. 박형룡은 이미 3년전 경남노회 신학수양회를 통해 소양이 이단과 자유주의 사상에 대해 한치도 양보하지 않는 철저한 신앙의 목회자 임을 확인한 데다, 최근의 초량교회와 마산문창교회의 목회, 그리고 총회에서의 그의 지도력으로 이미 교계에 잘 알려진 차제에 산정현교회 후임자로의 추천을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당회에 산정현교회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지도자가 바로 주기철 목사라며 그의 청빙을 강하게 권했던 것이다. 오산의 옛 스승 조만식이 문창에까지 내려가 소양의 청빙을 알리자 소양은 그것이 그를 향한 거룩한 부르심으로 받아들이고 주저하지 않고 문창을 떠나 평양으로 올라 온 것이다.

조만식, 김동원, 유계준, 오윤선과 같은 민족주의자들이 운집한 산정현교회는 서민층들로 구성된 초량교회나 문창교회와 달라 소양에게는 목회가 쉽지 않았다. 그로 인해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 아니지만 소양은 교회가 본래의 교회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는 자신의 목회 철학에 따라 소신 있게 목회를 해나갔다. 그결과 부임하기 전 100명으로까지 교세가 줄어든 산정현교회는 1937년 9월 5일 입당예배를 드릴 즈임에는 무려 600명으로 불어났다. 부임한지 불과 1년 여만에 교인수가 여섯배로 증가한 것이다. 교회 건축이 완료됨으로써 기존의 기와집 예배당이 서구형의 총 300평 규모의 2층 벽돌집 새 예배당으로 바뀐 것이다. 소양이 입당예배 설교때 밝힌 것처럼, 이 새 예배당은 주님이 재림하셔서 다스리실 “신천신지 새 예루살렘”에까지 영접될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곳, 바로 이것이 그의 교회관이었고, 이런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목회라고 생각했다. 소양은 교회가 조국의 미래에 대해 무관심해서는 안된다고 보았으나 그 시각이 산정현 교회를 주도하는 민족주의자들의 시각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정치적인 독립이나 경제적인 자립, 국민의 계몽에 교회가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이 민족의 미래를 밝게 만드는 것이 민족주의자들의 사고라면, 소양에게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복음과 그리스도에 충정하는 것이 결국 이 민족을 살리는 길이었다. 이면에서 소양은 한국에 복음을 전해준 구 학파 전통에 선 보수적인 선교사들과 맥을 같이하고 있었으며, 박형룡의 신앙의 칼라와 별 차이가 없었다. 진정한 사회와 민족에 대한 책임은 개인의 회심과 구원에서 출발되며, 때문에 개인과 집단의 영적구원이야 말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일차적인 책임이었다. 교회의 영적 책임이 사회적 책임과 무관하지 않지만, 영적 책임 없이는 진정한 사회적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민족주의자 가운데 민족주의자 였던 조나단 웨드워드가 교회의 영성회복을 자신의 목회의 일차적인 목표로 삼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점에서 소양도 예외는 아니었다. 소양은 입당예배를 드린 얼마후 1937년 12월 19일 “성신을 받으라”는 강한 멧세지를 증거한 것이다. 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에 동참하는 길은 바로 개인의 회심을 통해 구원의 은총을 힘입는 것이고 그 채널은 성신이었다. 일본의 무서운 도전 앞에 각 개인이 살아 남을 수 있는 것도 바로 성신의 충만을 통해서다. 성신을 받지 못한 영혼은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다. 죄인이 사유받고 구원의 은총을 힙입는 것이 십자가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게 만들고 “순교의 기쁨”을 얻는 원동력이었다.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은 성신의 능력과 권능을 힘 입을때 가능하다.

소양이 문창에서는 이단사상으로부터 교회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것이 그에게 맡겨진 시대적 사명이라고 확신했다면, 산정현 교회에 와서는 민족주의 운동으로부터 교회의 순수성을 회복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여겼다.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민족운동. 정치운동을 하기 위하여 교회에 들어온 사람이나, 인격을 높이며 도덕생활을 하기 위해 교회에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라 “중생하여 그리스도의 속죄를 중심에 품고 감사의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었다. 소양에게 이 민족을 향한 애국심과 민족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는 누구 보다도 이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열망했던 민족주의자였다. 그러나 그가 가슴에 지니고 있던 민족주의는 당시의 통속적인 민족주의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 민족이 죄를 자복하고 주께 돌아오는 바로 그것이 민족의 구원과 해방의 출발이었던 것이다. 이런 소양의 신앙은 목회를 하면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어릴때부터 소양이 받았던 신앙교육이었고, 또 성장하면서 그가 추구했던 신앙의 모습이었으며, 평신과 목회 현장에서 일관되게 견지했던 신앙의 모습이었다.

소양에게 신사참배는 제 1계명과 2계명을 어기는 배도의 행위였다. 이 때문에 소양은 신사참배로 인한 모든 책임은 담임목사 자신이 지겠다며 “신사참배에 호응한 신도는 지위나 신분을 불문하고 공개제명 출교해야 한다”고 역설했던 것이다. 이런 소양의 선포는 “國體明徽(국체명휘), 鮮滿一和(선만일화), 敎學振作(교학진작), 農工倂進(농공병진), 庶政刷新(서정쇄신)”등 다섯가지 지침을 내걸며 1936년 8월 부임 초부터 일본의 제국주의 정치구현을 외치던 제 8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미나미 총독이 9월 6일을 애국일로 정하고 미션스쿨에도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남장로교 선교부는 일제의 신사참배강요정책에 맞서 선교회 산하 미션스쿨의 인퇴를 결의하고, 그해 9월에 선교부 산하 10개 학교 가운데 광주의 숭일, 수피아, 목포의 정명, 영흥, 순천의 매산, 매산녀, 담양의 광덕학교를 모두 폐쇄했다.

신사참배를 국체의 이데올로기로 삼겠다는 총독의 부임과 그 배도적 강요에 굴복하지 않고 목숨으로 항거하겠다는 소양의 청빙이 거의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데는 인간의 역사(history) 속에 역사(work)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내재되 있었다.

 

IV. 소양의 순교: “진달래 필때 가버린 사람”

 

따라서 산정현 교회로의 부임은 시대적 요청이었다. 남부와는 달리 북부의 신앙은 보수성을 강하게 띠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평양의 교회들이 있었다. 소양이 부임하면서 산정현 교회는 평양의 교회 중에서도 더욱 보수적이었다. 자연히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있어서도 산정현 교회는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일제의 파괴 공작의 영향으로 친일세력이 득세해 1938년에 이르러 총회 마저 신사참배를 결정하자 교회는 겉잡을 수 없이 신사참배 쪽으로 기울고 말았다. 일제가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학교에서의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고, 전 국민에 대한 황민화정책을 가속화했던 것도 바로 이 때였다. 총독부가 교회에 “기독교인에게 국기 경례, 동방요배, 국가봉창, 황국신민서사 제창 실시” “일반신도의 신사참배에 대한 바른 이해와 여행에 힘쓸 것”을 골자로 한 시국관련 시정방침을 하달했던 것도 그해였다. 신사참배의 이면에는 일본 신들에 대한 봉체와 민족 정신의 말살, 식민정책의 실현, 황국신민화, 조선교회의 파괴의 의도가 깊숙히 자리잡고 있었다. 그와 함께 한국교회에는 상상할 수 없는 몰역사적이고 몰 신앙적인 현상들이 마치 경쟁이나 하듯이 여기 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났다:

 

“朝鮮基督敎徒는 皇國臣民으로 國體明徵, 國民精神總動員, 銃後後援, 精神作興 제行事를 忠誠으로써 行하여야 할 것이오, 行치 않으면 안될 것이다. ...

그러므로 皇國臣民으로서 國家의 元祖를 崇拜하는 神社參拜를 禮拜하는 것이 當然한 일이요, 異論할 必要가 없는 것 같다. ...

우리 基督敎徒들은 國家가 잇슨 然後에 宗敎가 있고, 宗敎만으로는 生을 完全히 못할 것을 깨닫고 皇國 非常時에 내버린 돌맹이가 되지 말고, 집짓는 데 모퉁이 주추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소위 지성인 중에 지성인이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이들이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앞장섰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들 대부분이 1934년 총회에서 자유주의 요주의 인물로 경고를 받았던 일본에서 신학교육을 받은 목회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보다도 일본을 잘알고 있었던 이 지성인들이 한국교회의 신앙적 전통을 친서구, 친선교사라고 매도하며 조선적 기독교라는 명분을 앞세우며 한국기독교의 해체 작업에 앞장서서 신사참배운동을 주도했던 것이다.

사실, 이시대 신사참배 분위기를 고조시킨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감리교와 천주교는 이미 오래전에 신사참배가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례라는 일본의 입장을 받아들여 참배를 결정했고, 장로교도 1938년 6월 전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한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노회들이 “當局의 指示대로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參拜는 국민정신통일을 위한 國家儀式임을 인식하고 ... 참배함이 국민의 당연한 義務인 동시에 교회 지도상 선명한 태도”라고 결의하고 직접 앞장서서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이에 앞서 1938년 4월 25일 유형기, 최성모, 김응조, 장정심, 박연서, 김유순, 김종우목사등 교계지도자들이 서대문 경찰서에 모여 “신사참배는 물론 기타 추후 보국제반 행사에 참가할 것과 일본적 기독교에 입각하여 황도정신을 함양”한다는 선언문을 채택하고 신민화정책에 앞장설 것을 결의한 일이 있다. 그해 9월 감리교는 “ ... 신사참배는 반드시 행할 국가 의식이요, 종교가 아니라 ... 신사참배가 교리에 위반이 추호도 없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라는 총리사 양주삼 박사의 명의의 성명서를 전국교회에 발송하였다.

 

1. 소양의 1차 검속

 

이런 상황에 고무된 일제는 장로교 총회에서 조직적인 신사참배 결정을 끌어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것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제일 짐스러운 존재가 바로 소양이었고,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구속할 구실만 찾고 있었다. 여기에 빌미를 제공해준 사건이 바로 평신 학생 장홍련의 사건이다. 전국에서 가장 교세가 막강한 평북노회가 1938년 2월 9일 신사참배를 결정하자 분개한 장홍련이 그 노회 노회장 김일선이 평신의 교정에 심어논 기념식수를 도끼로 찍어버린 것이다. 이를 기화로 신사참배 반대 세력을 척결하겠다는 일본의 단호한 의지가 “기왕에 도전적인 설교”로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앞장선 소양의 구속으로 이어진 것이다. 소양은 이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었다. 소양이 그일을 사주한 것도, 장홍련에게 그렇게 하도록 부추긴 것도 아니다. 다만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신사를 우상이라고 주저하지 않고 외치며 반신사참배의 기치를 확고하게 내걸며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구심점을 제공하던 소양의 행실이 미웠던 것이다. 2월 18일로 예정된 헌당일을 앞두고 소양이 구속되었다. 하지만 이미 순교를 각오한 소양에게 일제의 구속은 전혀 위협의 대상이 아니었다. 3개월 후 소양은 풀려났다.

바로 이런 신사참배 운동이 한국 전역을 휩쓸고 있던 1938년 6월 30일 일본 기독교대회 의장 도미타(富田滿)가 평양에 도착한 것이다. 이때 소양은 구속되었다 석방된후 이유택, 김화식과 입산, 금식기도를 마치고 돌아 온지 얼마되지 않아서다. 그가 평양을 방문한 것은 한편으로는 신사참배를 지지하는 친일 세력들을 격려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사가 종교적인 문제라며, 끝까지 참여를 반대하는 소양과 정면대결을 하기위해서였다. 도미타는 대단한 자신감을 가지고 반대세력을 평정하기 위해 자신만만하게 평양에 입성했다. 여기서 그가 장황하게 늘어 놓은 것은 신사가 종교가 아니라는 일본정부의 입장이 누누히 있었음에도 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느냐는 것과, 참배를 물리적으로 강요한 적이 없는데 순교라니 웬말인냐는 공격이었다.

 

여러분의 순교적 정신은 훌륭하다. 그러나 언제 우리 일본 정부가 기독교를 버리고 신도로 개종하라고 윽박질렀던가. 그 실례를 보여달라. 국가는 국가의 제사를 국민인 여러분에게 요구한 데 불과하다. ...

 

그러나 논리적이고 차분한 소양의 반론에는 당할 수 없었다. “신사를 종교와 일치시킨 저작물들”을 통독해 둘의 연관성이 자명하게 드러나 있는 작금의 일본 기독교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소양이 신사가 제 1계명과 2계명을 어기는 우상숭배라며 도미타의 허를 찔렀던 것이다. 소양의 용기, 그것은 거대한 로마 캐톨릭 교권을 등에 엎고 면죄부를 판매를 높이기 위해 그 정당성을 외쳐대던 존 테즐(John Tetzel)에 대항해 면죄부의 부당성을 당당하게 외쳤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용기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소양 혼자 힘만으로는 참배의 여세를 반전시킬 수는 없었다.

총회가 열리던 9월 9일까지 장로교 총회 산하 27개 노회 가운데 무려 과반수가 넘는 17개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신사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깃발을 휘날리며 친일 세력을 앞세운 장로교 총회의 파괴 공작은 예상했던 것 보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드디어 1938년, 참배의 물결이 동양의 예루살렘, 사무엘 마펫의 도성 평양 마저 무너트린 것이다. 1938년 9월 9일 저녁 8시, 총회 산하 27개 노회 총대 223명(목사 99명, 장로 89명, 선교사 35명) 중 193명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열린 27회 총회는 97명의 경찰관이 총대들 틈에 배석한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총회 이틀째 되던 날, 총회장에 선임된 홍택기 목사는 이미 사전 각본대로, 안주노회 박응률의 제안에 따라 신사참배를 가결하였던 것이다:

 

我等은 神社는 宗敎가 아니오, 基督敎의 敎理에 違反하지 않는 本意를 理解하고 神社參拜가 愛國的 國家儀式임을 自覺하며, 또 이에 神社參拜를 率先勵行(여행)하고 追히 國民精神 總動員에 參加하여 非常 時局下에서 銃後 皇國臣民으로서 赤誠(정성)을 다하기로 期함.

 

총회장은 “가하면 예하십시오”를 물은후 반드시 뒤 따라야 할 “아니면 아니라 하십시오”라는 반대 의사를 총대들에게 묻지 않았다. 삼엄한 일경의 감시하에서 감히 반대 의사를 물어 볼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참배결정이 선언되자 북장로교 소속 블레어(W.N. Blair) 선교사가 “신사참배는 우상”이라며 총회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그러나 소용 없는 일이었다. 불과 4년전만해도 한 목소리로 자유주의 타도를 외쳤던 총회가 배도의 결정을 내린 것이다. 처음부터 총회의 진행을 목격한 선교사들이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제하며 신사참배가 장로교 헌법과 성경에 위반된다며 총회의 신사참배 결정의 위법성을 지적했음에도 총회는 “토의 해볼 가치도 없는” 안건이라며 묵살해 버렸던 것이다. 즉시 신사참배를 실행하자는 평양기독교 친목회원 심익현의 요청에 따라 전국 노회장 23명, 만주노회장 4명, 모두 27명이 총회를 대표하여 김길창목사의 안내로 평양신사에 가서 참배를 실행에 옮긴 것이다. 김인서가 “아! 비극의 27회 총회”라고 탄식할만도 했다.

배도의 길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총회장 홍택기목사는 전국교회에 서한을 보내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것은 “총회의 결의를 경멸하는 행동일 뿐만 아니라 주님의 뜻에 위배되는 유감천만의 행동”이며 “아직도 옛 습관으로 해서 이를 보류하거나, 주저하는 자가 있다면, 저들은 결코 신민으로 인정될 수 없으며, 교인으로도 인정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교회의 입장으로 볼때도 이러한 반대하는 무리나 요소는 마땅히 처벌되어야 한다”고 경고했다. 각 노회는 한국에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해준 주도적인 선교사들을 제명처분시키고, 노골적으로 일본적 기독교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제 교회는 허울만 교회였지, 일본제국주의의 시녀로 전락하고 말았다.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하던 그해 12월 서울 부민관에서는 정춘수, 김종우, 김우현, 차재명, 장홍범, 원익상, 이명직, 윤치호, 구차옥등이 모여 조선 기독교 연합회를 조직하고 “황국신민으로서 보국에 성”을 다하겠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한국교회가 자랑하는 민족주의 기독교 지도자 윤치호를 포함한 내노라하는 교계 지도자들마저 일본인 단바세이를 회장으로 선출하여 일본기독교와의 연합을 이루려 했으니 이 어이된 일인가.

1938년 평양신학교를 폐교한 선교사공의회는 이듬해 9월 “신앙 양심상, 정부의 요구에 따라 신학교를 운영할 수 없다”는 지난해의 결정을 재확인했다. 1940년 9월에는 22년간 지속되어 오던 신학지남 마저 폐간당함으로써 40년간 한국교회의 보수주의를 주도하던 평신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1939년 “국민정신총동원 예수교장로회 연맹”이 결성된 후 총회 역시 형식만 존재하다 그나마 1942년 이후에는 완전히 해체되고 말았다.

2. 소양의 2차 검속

 

소양이 총대로 참석만 했더라도 38년 총회가 감히 그런 결정을 내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런 것을 미리 우려한 일제는 9월 총회를 앞두고 8월에 그를 다시 검속한 것이다. 첫 검속이 3개월 간이었으나 두번째 검속은 1939년 2월까지였으니 거의 반년이나 계속되었다. 소양이 2차로 검속된 이유는 외형적으로는 농우회 사건과의 연루였다. 조선교회의 경제 갱생을 위해 유재기(1905-1949)목사가 운영하던 농우회는 소양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이유택, 송영길, 박학전과 함께 구속되었던 소양은 7개월간 의성경찰서에서 보낸후 1939년 2월 석방되었다. 아무리 세찬 비 바람이 몰아친다해도 뿌리 깊은 소양의 신앙 절개를 꺾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시련이 계속되면 될수록, 그 바람이 거세면 거세질수록 소양의 절개는 더 깊어져만 갔고, 순교의 각오는 더 강해져만 갔다.

대구경찰서에서 풀려나 평양에 돌아오던 그날은 마침 주일이었다. 바로 그날 그는 그 유명한 5종목의 기도를 설교한 것이다. 무서운 고문과 오랜 수감생활로 소양의 육신은 말할 수 없이 쇠잔했지만, 거기서 우러 나오는 소양의 설교는 입추의 여지 없이 새 예배당을 가득 메운 산정현 교인들을 결단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평양, 대동, 선교리 세 경찰서의 형사대가 교회 안팎을 포진하고 있는 가운데서, 소양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행해진 주님의 겟세마네의 결단처럼, 앞으로 닥칠 순교를 예견하는 설교였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지루한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

“노모와 처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옵소서.”

“내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이것은 설교가 아니라 죽음을 앞에 둔 소양의 유언이며 기도였다. “5종목의 나의 기도”로 알려진 이 설교는 소양이 얼마나 철저하게 순교를 각오하고, 그것을 준비해왔는가를 보여준다. 이 설교에는 “죽음” “고난” 죽음 후의 가족 “부탁” 의를 위한 죽음, 영혼의 부탁, 모두 십가가 상의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언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는 어휘들로 가득차있었다. 소양은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2,000여명을 가득 메운 산정현교회 새 예배당은 순식간에 눈물의 바다가 되었다. 일사각오로 점철된 소양의 신앙의 절개를 일경인들 꺾을 수 있으랴. 왜 한국교회 신사참배 반대 운동이 소양의 산정현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가는 구태여 설명이 필요 없다. 소양의 신앙의 절개는 산정현교인들로 하여금 결코 우상 앞에 절할 수 없다는 실존적인 신앙의 결단을 촉구했고, 그면에서 조선 기독교의 자존심을 기켜주었다.

 

3. 소양의 3차 검속

 

소양은 1939년 9월 세번째로 검속되었다. 이미 1939년 3월 제 74회 일본제국 의회가 종교단체법안을 통과시켜 일제의 조선교회 지배의 법적 장치를 마련한 상태에서 소양의 검속이 용의주도하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소양이 검속된 그 기간, 조직적이고 끊질긴 산정현 교회 해체 공작이 진행되었다. 10월 22일 평양경찰서가 산정현교회에 “신사참배에 불응하면 산정현예배당 폐쇄”라는 통지문을 보내자 참배결의를 유예하며 경찰의 요구에 몇개월을 버텼다. 담임목사 없는 산정현 교회 당회와 제직들은 일제의 방해공작에 과감하고 훌륭하게 대처하였으나 1940년 3월 26일, 교인 13명을 검거하고 강압적으로 집회정지 조치를 내리자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었다. 일제의 방해공작은 교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집회정지 명령을 내려 산정현 교회를 해체시킨 일제는 평남 경찰부장 세또 도이찌 주도로 평양노회 노회장 최지화를 사주해 1939년 12월 19일, 소양이 투옥되어 있는 동안, 평양노회로 하여금 소양의 목사면직과 신사참배 반대운동 파괴공작을 단행하도록 만들었다.

 

1) 주기철은 그 목사직에서 파면.

2) 편하설(片夏薛) 선교사가 산정현 강단에 서는 것을 禁止함.

3) 張雲景을 산정현교회 당회장으로 택함.

4) 일곱 長老들을 休職함.

5) 산정현교회 수습위원으로 張雲景, 朴應律, 沈益鉉, 金善漢, 李仁植 등 7人을 택함.

 

1939년 12월 20일자 동아일보에는 “問題中의 朱 牧師, 平讓老會서 사임결의”라는 기사가, 같은 일자 매일신보에는 좀더 소상하게 “問題의 牧師는 免職코 “神社參拜를 實現키로” “平讓山亭峴敎會事件段落”이라는 기사가 실렸고, 조선일보는 “朱牧師에 辭職勸告 老會에서 總會決意와 總會長警告無視理由로 平讓山亭峴敎會 問題의 進展”이라는 기사를 게재해 면직 이유와 근거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1940년 3월 24일 부활주일 아침, 노회의 결정은 산정현교회 교인들의 반대 속에서 그대로 집행되었다. 노회로부터 산정현교회 처리를 위임맡은 전권위원장 장운경이 “금반 형편에 의하여 당분간 산정현교회 집회를 정지함”이라는 평양노회 전권위원장 명의의 경고장을 가지고 위원 8명을 대동하고 산정현교회에 가서 그일을 집행했던 것이다. 이제 총회는 물론 노회는 더 이상 목회자의 모임 단체가 아니라 일제의 프락치였다.

경찰이 교회 입구 대문을 폐쇄했고, 노모 조재선과 아내 오정모, 그리고 두아들 영해, 광조가 살던 산정현교회의 목사관을 평양신학교 교수 사택으로 사용해 달라는 평양신학교의 청원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새로 개편된 평신 교장이 들어가고, 추운 겨울, 집을 잃어 버린 소양의 노모와 두 아들은 헛간에서 사흘을 보내고 길거리로 쫓겨나고 말았다. 그 집에 들어가 사는 당시 평양신학교 교장 채모 교수는 신사참배가 황국신민의 기본도리요, 기독교인의 당연한 의무라고 외치면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했으니 이 어찌된 일인가. 교권을 장악하기 위해 로마정권을 등에 엎고 콘스탄틴 대제야 말로 “선한 백성들의 보호자,” 하나님이 보내신 하늘의 지도자라고 외쳐댔던 초대교회 어용신학자(official theologian), 유세비우스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해방이 될때까지 13번이나 집을 옮겨다녀야 했고, 영진은 염전과 탄광을 전전해야만 했고, 영해와 광조는 동방요배 거부로 숭덕학교에서 쫓겨나 컬슬러 목사가 경영하는 성경구락부에 다녀야 했다.

소양의 구속은 신사참배반대운동을 더 강하게 점화시키는 원동력이었고, 산정현교회 교인들이 교회의 폐쇠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흩어진 가운데서도 신앙의 순결을 위해 투쟁하도록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1940년 2월 이기선은 철산 용산교회 박신근집사로부터 “평양 산정현교회에서도 신사참배반대하는 이들은 교회에 안나가고 자택에서 예배를 본다. 우리도 끝까지 성경대로, 신앙은 계속하여 우상숭배인 신사참배는 절대로 배격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해 4월 한상동은 채정민에게 다음과 같은 소식을 전한다.

 

“평양산정현교회가 신사불참배로 목사 주기철은 검속 당했으나, 남은 신도들이 적시 굴복하지 않고 완강하게 신사참배를 거부함으로 최근에는 당국도 이들 불참배교도들의 완강한 태도에 약간 굴복한 감이 있다”

 

소양만 감옥에서 외롭게 투쟁한 것은 아니었다. 방계성, 한상동, 이기선, 손양원를 비롯 상당수의 신앙인들과 한부선(Bruce F. Hunt), 함일돈(Floyd Hamilton), 말스버리(D.R. Malsbury)를 비롯 독립선교회 소속 선교사들도 “일본의 신궁신사는 모두 ...우상숭배”라는 확신 속에 신사참배반대운동을 주도해 나갔던 것이다.

 

4. 소양의 마지막 검속과 순교

 

1940년 4월 가석방에서 돌아온 소양은 이미 평양노회가 자신의 목사직을 면직시킨 것을 발견하고 이미 배도의 길로 깊숙히 접어든 노회의 변모에 목이 메어 “사람에게 쓰러버리우는 예수님의 고독의 자취를 우리도 밟아야 하고 ... 이 핏자국에 엎디어 이 몸을 십자가의 제단에 드려야 합니다”며 탄식했던 것이다.

1940년 6월 한상동, 주남선등 10여명을 신사참배반대운동의 주동자로 구속한 일경은 4월 20일 잠시 가석방해 있던 소양을 한달여만인 6월에 다시 네번쨰로 투옥시켰다. 뒤이어 9월 25일에는 여수경찰서에 손양원 목사가 검속되었다. 소양이 검속되었고, 교회마저 폐쇄되었지만, 그 생명력은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유계준, 오윤선, 그리고 조만식 장로등이 주기철 목사 가족과 주목사가 투옥되어 있는 동안 교회의 성도들을 도와준 백인숙전도사와 방계성전도사 그리고 사찰의 생활비를 지원해주었다.

1940년 9월부터 1944년 4월까지 계속된 마지막 투옥 기간동안, 소양은 자기와의 힘든 싸움을 계속해야 했다. 죽음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진 그 고독한 감방에서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 가혹한 고문과 그로 인한 후유증, 끊이지 않게 괴롭히는 육체적 아픔, 그리고 열악한 감방의 식사로 소양은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정작 죽음 앞에선 그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의 권세”도, “지루한 고난”도, “의를 위한 죽음”도, 그의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이세상에 남아 있는 “노모와 처자”의 장래였던 것이다. 고독한 감방에서 자신의 생명이 얼마남지 않은 것을 예감하고, 하루 하루 병고와 싸우며 생명을 부지하던, 1944년 4월 13일자 소양의 유언은 가족들의 장래에 대한 염려로 가득차 있다. ,

 

“여드레 후에는 아무래도 소천 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몸이 부어 올랐습니다. 막내 광조에게는 생명보험을 든 2백원으로 공부를 시키십시오. 어머님께 봉양 잘하여 드리고 ...어머님께는 죄송합니다.”

 

소양은 이 유서를 한국인 간수 안태석을 통해 오정모에게 전달했던 것이다. 이것을 받아든 사모 오정모의 첫 마디가 “목사님이 아직까지 가정에 무슨 미련이 남아서 이런 것을 보낸 것이냐”였다. 두번째의 검속되 오랜 감옥생활에서 풀려난 소양에게 “승리요? 다시 감옥에 들어가시오, 어서 다시 들어갈 준비를 하시오”라며 첫마디를 건넨 오정모, 이미 그녀는 한국교회의 장래가 소양에게 달려 있음을 너무도 뼈져리게 간파하고 있었고, 그길을 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그녀에게 맡겨진 신의 섭리라고 믿었다. 엄청난 신앙의 결단,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냉철함,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신앙의 투지 그것은 인간 오정모, 그녀를 여타의 여자와 구별짓는 특성들이었다. 주기철 그는 한국 교회를 앞서간 선각자이기에 앞서 평범한 한 사람이었음을 발견한다.

소양은 돌박산의 진달래가 한창 피어오르던 1944년 4월, 아내와 마지막 면회를 끝낸 그 다음날, 21일 오후 9시, 노모가 꿈에 예견한 대로 그리고 그가 이미 8일전에 예견한대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늘나라로 갔다. 드디어 “주님께서 순교자의 면류관”을 그의 머리에 씌워주심으로 소양은 달려 갈길을 다 달리고 거룩하고 영광스런 순교자의 반열에 참여한 것이다. “나를 웅천에 가져가지 말고 평양 돌박산에 묻어” 달라는 유언대로 그는 천사장의 나팔과 함께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평양 돌박산에 평안히 잠들어 있다.

 

V. 소양의 생애가 주는 교훈

 

소양의 생애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는 몇가지 우리들에게 역사적인 교훈을 제시한다. 한마디로 그의 생애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은 그의 신앙과 삶이 당대 뿐 아니라 이시대의 이상적인 모델이라는 사실이다. 소양의 삶은 그의 신앙과 통일성을 지니고 있었다. 소양의 생애에는 그가 받은 어린시절의 신앙교육, 오산에서의 민족교육, 김익두목사의 집회 때의 회심이 깊숙히 자리잡고 있었고, 이것이 사상적으로 정리되어 나간 것이 평양신학교에서 였다. 그리고 그것이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구현된 것이 초량교회, 문창교회, 그리고 산정현 교회에서의 목회였다. 그의 전 생애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신앙의 맥, 그것은 철저하게 성서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소양에게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따라서 “신앙과 행위의 절대 무오한 규범”이요 “설교의 절대적 원천”이었다. Daniel Baumann이나 P.T. Forsyth가 지적한바 설교는 성경 진리의 전달이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설교라는 가르침이 주기철의 목사의 설교와 삶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둘째는 그의 민족에 대한 사랑은 당시의 정치적 민족주의자들과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오산에서의 교육을 통해 민족주의와 반일 사상을 깊이 접한 것은 사실이지만, 회심 이후 소양은 민족의 진정한 희망은 복음화와 복음의 바른 실천에 있다고 보았다. 이것이 바로 거대한 일제의 압력에 대처하는 길이고, 이 민족이 진정으로 사는 실이라고 확신했다. 그의 오산에서의 민족주의가 평신에 오면서 종교적인 차원으로 승화, 발전되어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순수 기독교 민족주의의 형태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셋째 그의 바른 신앙은 그가 어릴때부터 받았던 신앙교육과 평신의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불굴의 신앙, 신사가 우상숭배라고 삶으로 생명 내놓고 외치는 그 바른 신앙은 일찍이 한국에 파송된 구학파 선교사들이 평신에서 가르쳐준 신앙이었고, 주기철과 함께 반신사참배운동을 전개했던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의 신앙, 바로 그것이었다. 이단들에 대해서 한치의 양보도 없었던 그 정통의 신앙이 신사가 단순히 국민의례에 불과하다며 호도하는 일제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이점에서 “신사참배로 인한 대 박해 문제는 교회에 심한 환난이었을 뿐만 아니라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를 구분하는 표식이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그의 생애에 대한 사료 문제다. 실제 그의 설교원고가 남아 있지 않고, 그의 관한 전기도 김인서나 몇몇 사람들의 증언에 의존하였기 때문인지 상이한 부분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심지어 탁월한 교회사적 안목과 엄청난 에너지를 동원해 재구성한 민경배 교수의 <순교자 주기철목사>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필자 역시 소양의 생애를 기술하면서 직면한 가장 큰 어려움이 통일성이 없는 상이한 자료들에 근거하여 그의 생애를 재구성하는데서 생기는 역사 기술의 문제였다. 역사서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정확한 사료인데, 정확성이 결여된 사료들을 가지고 생애를 통일성 있게 재구성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과연 노회장 최지화의 평남노회가 언제 소양의 목사직 면직을 결정했는가와 같은 가장 기본적인 데이타에서 만이라도 통일성과 정확성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것은 한국의 교회 역사를 사랑하는 이들과 교회의 전통을 이시대에 재발굴하여 소개해야 할 우리 모두의 몫이다.

 

소양 주기철 목사의 생애-박용규 | 신앙의 선배들

조광성 2010.11.12 22:46   http://blog.daum.net/holylife2/17208340
출처 : 생명나무 쉼터
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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