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 감사 그리고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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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비우는 훈련
육신 안에는 잠복돼 있는 수많은 죄성, 악성, 독성,
부패성, 그리고 상한 감정들이 뒤엉켜 있다.
우리에게는 지하수처럼 안에서 솟아나는 육의 속성과
환경을 통해서 스며들어오는 육의 속성이 있다.
성경에는 이런 육적인 속성들을 열거하고 있다.
(엡4: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갈5:19-21)
“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
예수님은 반석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실 때,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분다고 하였다(마7:27).
“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비는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것이고(타고난 기질 혹은 성향),
창수는 우리 몸 안으로부터 밖으로 나오는 각종 쓴 물을 말함이며,
바람은 사방에 창일한 각종 세상 풍속을 일컬음이다.
노아 홍수 때에도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땅 속으로부터 물이 솟아올랐다(창7:11;8:2).
방주와 성막은 인간의 몸의 구조에 대한 상징이기도 하다.
(방주의 3층 구조는 인간의 영과 혼과 육체와 같음)
이는 세상 유혹이나 죄가 사람에게 침투하는 경로를 보여준다.
우리에게는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시험이 있는가 하면,
부패한 자아 안에서 솟아나는 유혹(시험)이 있으며
주변 환경을 통해서 스며드는 유혹 혹은 시험도 있다.
불교에서도 백팔번뇌를 죽이라고 할 정도로
인간의 내부에는 엄청난 양의 구정물이 고여 있다가
일단 흔들어대면 창수처럼 솟구쳐 올라 밖으로 나온다.
주님도 몸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였다.
사람 안에는 긴 세월 동안 누적된 묵은 감정, 상함 감정,
썩어 문드러진 감정들이 쌓여있다.
이것 역시 처리해야 할 또 하나의 육신이다.
불교에서는 비움을 강조하지만,
우리 기독교에서는 비움과 채움을 역설하고 있다.
일단 청소를 해서 비웠으면 새롭고 좋은 것으로 채워야 한다.
사람의 마음은 새 것으로 채워지지 않고 비워두면,
이내 옛 것으로 다시 채워져 버리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 생각,
하늘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
사람의 마음은 그 무엇으로 가득 채워 있게 마련이다.
새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 한, 옛 것이 채워져 있기 마련이다.
비움과 채움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에서 비움은 공허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공허감은 생명이 아닌 것들로 비워있는 상태를 말함이다.
(창1:2) 불신자의 마음 상태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 자체다.
이런 마음속에 생명의 빛이 들어옴은
새 생명에로의 탄생 즉, 거듭남을 의미한다.
오직 하나님만 어두워진 심령을 빛으로 밝게 하실 수 있다.
오직 하나님만 새로운 생명의 빛을 공급해주실 수 있다.
하나님이 (창1:3) '빛이 있으라'하시매 빛이 있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기이한 빛 가운데로 들어가야 한다.
빛을 마셔야 한다. 마음을 빛으로 채워야 한다.
사람의 영은 하나님의 등불이다.
우리가 가나안의 은총을 힘입어 살기 위해서는
먼저 (1)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한 후에
(2) 가나안 칠족을 진멸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나는 이 칠족 진멸 과정을 아래와 같이 비움으로 설명하고 싶다.
우리는 무엇을 비워야 할까?
그리고 무엇으로 채움을 입어야 할까?
먼저 비워야 할 것들을 살펴보자.
1 교만을 버리기
(행12:23) 헤롯왕이 연설했을 때 백성들이 신의 소리 같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벌레가 갉아 먹어 죽었다.
하나님이 하신 것을 내가 했다고 말하는 게 교만이다.
다윗이 안수 받은 후 23년 후에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위해 나를 왕으로 세우셨다'고 진술했다.
어떤 일이든 내가 최종 결정을 내리면 그게 바로 교만이다.
교만은 내가 주체가 되어 내가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내가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과 맞먹는 행동이다.
내 안에, 내 주변에 교만이 깔려 있다.
교만적인 성향까지 뿌리 뽑아야 한다.
남들을 무시하고, 경멸하고, 차별하고, 학대하는 것이 교만이다.
어떤 일이나 결정이든 하나님을 배제하고, 하나님 없이 행하는 게 교만이다.
마치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은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게 교만이다.
(대하7:14)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한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이게 영의 나로 변화 받는 길이다.
2 탐심(욕심)버리기
하루에 한 가지씩 집중적으로 처리 훈련하는 습관을 들여라.
탐심이란 무엇인가?
세상에 속한 것을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그 이상의 것을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탐심은 우상 숭배다.
탐심이 왜 우상 숭배인가?
마음을 사로잡아 집착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근시안적인 일에 얽매이게 한다.
자족의 비결은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것으로
만족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영역을 넘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영역과 사람의 영역이 있다.
현재 내게 주어진 상황에 감사하는 자가 되도록 힘쓰라.
모든 제반 문제는 탐심에서 비롯된다.
탐심이 십계명을 다 어길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다.
(딤전6:7) 우리가 이 세상에 빈손으로 왔듯이,
돌아갈 때도 다시 빈손으로 가게 됨을 기억하라.
탐심은 육의 마음이다.
세상에 가치를 두고 거기에 마음 두는 것이 탐심이다.
탐심을 적극적으로 물리쳐야 한다.
세상 것이 영을 통해 말씀이 들어오는 통로를 막는다.
(마13:22)“가시떨기에 뿌리 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우리가 은혜 받았다는 말은 영에 관계된 말씀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탐심은 초극하기 힘든 평생의 과제다.
우리의 부패한 속성 안에서 솟아나는 창수와 같기 때문이다.
날마다 처리하고 퍼내어 비우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먹을 것과 마시고 입을 것은 인간 실존의 기본 욕구이지만,
천국의 삶을 그리워하고 구하는 자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였는데,
그의 나라는 장차 우리가 들어가 살게 될 우리의 영원한 본향이며,
그의 의를 구하라 함은 주님 뜻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일체의 비결을 터득했다고 고백했다.
비교 의식이나 열등의식은 탐심에서 태어난 사생아들이다.
자신의 영역에만 집중하라.
운전할 때 당신 앞에 켜진 신호등만 따르면 된다.
어떤 목표를 세울 때 비뚤어진 생각이 떠오르면 빨리 지우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생각이나 지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타락한 생각이 집단적으로 뭉칠 때 불의한 사회가 된다.
말세에는 자기 사랑, 돈 사람, 세상 사랑으로 변한다(딤후3:-4)
3. 집착 버리기
집착이란 마음속에 착 달라붙어 있는 것이나, 포기하기 어려운 어떤 것을 말한다.
이는 주로 자식, 명예, 인기, 지위에 가치를 둘 때 생긴다.
무엇이든 내 것이라 여길 때 집착하게 된다.
소유심이 문제다.
소유심이 집착하게 만든다.
나는 단지 관리자 혹은 청직이라는 의식을 갖는 게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생각의 결국이 그리스도께로 향하도록 힘써야 한다.
흐르는 강물처럼 떠나보내기 혹은 흘려보내기를 연습해야 한다.
부자 청년은 구원받고 싶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안 속으셨다.
청년 마음속에는 영생에 대한 갈망보다는 탐심이 가득차 있었다.
부자 청년에게는 부요가 그의 생명과 같은 것이었다.
사람이 10억을 5년 보관하는 것과 10년을 보관하는 데는 차이가 있다.
오래 보관하면 할수록 거기에 면역이 생기거나 무감각하게 되기 쉽다.
가면도 오래 쓰다 보면 자기 얼굴처럼 여겨지는 것과 같다.
예수를 닮으면 닮을수록 그만큼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된다.
자유의 폭이 넓어질수록 예수를 가까이하는 사람이 된다.
아직도 이런 저런 이유로 부자유스런 사람은 비우는 일을 더 해야 한다.
우리의 육적인 의지로는 율법을 준수하기가 불가능하다.
영의 나를 성장시킨다는 차원에서 율법을 지키면 쉽고 자유로와진다.
예수님은 세리들과 죄인의 친구라 비난받았고,
먹기를 탐하는 자라는 혹평도 들었지만, 식탁 교제를 즐기셨다.
이는 잔치 집 인생을 살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다.
4. 자랑을 버리기
사람들에게 칭찬듣는 것이 하나님께 미움받는 일이 된다.
세상 자랑 말고 하늘을 자랑하도록 힘쓰라.
바울은 세상적, 육신적, 인간적 자랑을 배설물처럼 여겼다.
그는 오로지 예수님과 십자가만을 자랑했다.
자랑은 교만의 친구다.
뿌리깊은 영성의 사람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는 고백 속에 살아간다.
(요일1:15)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은
마귀 적이요 세상 적이며 정욕적인 어두움의 일들이다.
청직이 의식을 가지면 가질수록 자랑이 없어진다.
육적인 속성이 자라지 않도록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의 인기, 관심, 보상 심리를 의식적으로 멀리하라.
5. 정욕을 버리기
우리의 싸움의 대상 제 1호가 바로 정욕의 문제이다.
강한 육성을 가진 자일수록 음란한 사람이 되기 쉽다.
지금은 악하고 음란한 시대이다.
사람들이 대 낮에 버 젖이 시집가고 장가가는 세대다.
육신의 정욕은 내 안에서 솟아오르는 정욕이다.
사람 속에서 나오는 게 사람을 더럽게 한다.
정욕(음란)의 죄는 몸 안에서 짓는 죄이기 때문에 가장 깊고
끈질긴 뿌리 깊은 내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만큼 처리하기 힘들다.
특히 대물림 된 속성은 '자아 처리와 절제된 행동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이라는 삼박자 역할을 통해 처리해 나갈 수 있다.
이 세대는 마치 거대한 회칠한 무덤과 같이 변하고 있다.
세상 곳곳에서 음란을 조장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채팅, 음란한 게임, 각종 포르노 사진, 동성애, 수간 등).
하나님의 심판은 항상 죄인이 많을 때가 아니라,
의인을 찾아보기 어려울 때 임했다<의인 열 명(롯), 의인 한 명(예레미아)>.
하나님은 의인의 수와 삶에 관심을 갖고 계신다.
육신의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해서는 안 된다.
생각을 처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
에로틱한 사진을 보게 되면 그 잔상이 마음에 새겨지게 된다.
포르노 사진을 보면 성욕이 창수처럼 안에서 솟아나게 된다.
사람의 눈은 마음이 사랑하는 것에 멈추길 좋아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보는 일에 각별한 주의를 해야 한다.
공자도 이런 말을 했다. "예가 아니면 보지를 말라.'
이슬람에서는 포르노와 관련된 활동을 일절 금지하고 있다.
무엇을 저장시키고, 들을 것인가에 대해 자주 경계를 하라.
6. 화(분노)를 버리기
혈기를 죽이도록 힘써야 한다.
자아가 파쇄 되는 만큼 혈기가 맥을 못 추게 된다.
혈기부리는 일은 나는 물론 하나님도 싫어하신다.
혈기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해가 질 때까지 분을 품지 말아야 한다.
잠잘 때까지 분노하면 다음 날 결국 해로운 행동을 하게 된다.
급하게 내뱉는 말이 덕을 세우는 경우는 없다.
듣기는 속히 하되 말하는 것은 천천히 해야 한다.
지속적인 분노는 화병을 일으키며 내장까지 손상시킨다.
'속상해 죽겠네'라는 말처럼 분노는 속을 상하게 하고 생명을 단축시킨다.
반대로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 같아서 생명을 건강하게 보존시켜준다.
장수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매사에 여유 있고 너그러운 사람들이다.
모세의 온유가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나았지만,
단 한 번의 혈기는 그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육을 죽이는 게 최선의 방책이다.
시체는 말, 감정, 혈기, 분노가 없다.
역사적인 회개를 하도록 힘쓰라.
이는 유년 시절부터 가지고 있었던 죄 성을 회개하는 것이다.
사람은 영적으로 공허할수록 더 자랑하고 드러내고 싶어 한다.
열등감이 심할수록 돌출 행동을 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7. 의심을 버리기
믿음도 연단 받아야 성장한다.
훈련 없이 되는 일이 없다.
의심의 꼬리들이 걱정을 만들어 낸다.
의심, 염려, 걱정, 불안은 육신의 한계를 보여준다.
'의심의 안개 걷히고 근심의 구름 없는 삶'을 꿈꾸라.
왜 의처증이나 의부증이 생기는 걸까?
과거에 의심을 받아왔거나 의심을 해봤기 때문이다.
의심을 심으면 의심의 열매를 거두기 마련이다.
의처증이나 의부 증을 치유하는 방법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자신 안에 있는 각종 의심의 뿌리를 뽑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먼저, 하나님을 신뢰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다음에는, 의식적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연습을 부단히 해야 한다.
불안, 초조감은 의심이라는 사생아를 잉태한다.
하나님에 대한 의심은 불신앙을 조장하고, 사람에 대한 의심은 관계를 파괴한다.
의심이라는 불신의 가지를 쳐내어 십자가 아래에 파묻어 버려야 한다.
그곳에 대신 믿음과 화평과 성결의 나무를 심어 꽃 피워야 한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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