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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생각/ 믿음과 묵상

술에 대하여

elimcy 2019. 3. 30. 06:08

술은 구원의 기준이나 훌륭한 신앙의 기준 아냐
음주 자유로운 사람, 자신의 음주 정당화 말고
교회도 술 한 잔에 지옥 갈 것처럼 정죄 말아야"

<예함교회 강하룡 목사>님의 '술'에 대한 명쾌한 정리 (3.27)

■ 술에 대해 부정적인 성경 구절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상처가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그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구부러진 말을 할 것이며”(잠 23:29-33)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고 하면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로 된 초나 독주로 된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민 6:2-3)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눅 1:15)

“르무엘아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고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며 독주를 찾는 것이 주권자들에게 마땅하지 않도다”(잠 31:4)

■ 술에 대해 긍정적인 성경 구절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요 2:10-11)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마 11:19)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20)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시 104:15)

■ 전제. 술은 구원의 기준, 신앙의 기준이 아니다

첫째, 술은 구원의 기준은 아니다. 구원의 기준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믿음이다. 술을 한 잔 마셨다고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 아니다.

둘째, 술은 훌륭한 신앙의 기준이 아니다. 훌륭한 신앙의 기준은 가정과 일터에서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배우고 순종하는 태도에 있다(마 28:19-20). 술과 담배를 하지 않지만 직업인으로 엉망인 삶을 살았던 크리스천들이 많이 있다. 특히 크리스천 정치인들이라는 사람들이 이 땅을 황폐화시키고, 서민 경제를 죽이는 정책을 펼친 것을 보라. 건강한 신앙은 음주 여부가 아니라 가정과 일터에서의 삶의 질로 평가되어야 한다. 정치인들, 기업인들, 직업인들이 각자의 일을 주께 하듯,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다.

셋째, 따라서 술은 신앙과 관련되어 비본질이다. 술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본질이 없으면 비본질에 목숨 걸게 된다. 술 문제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한국 교회의 신앙의 현실을 드러내는 증거가 된다.

■ 술과 신앙에 대하여 오해와 혼란이 많은 이유

술에 대하여 혼란스러운 이유는 술을 문화적인 문제로 볼 것인가 윤리적인 문제로 볼 것인가에 대한 기준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화는 옳고 그름이 없다. 의복 문화, 음식 문화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윤리는 옳고 그름이 있다.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기준이 있다.

성경에서는 술을 문화로 보는 관점도 있고, 윤리로 보는 관점도 있다. 술을 문화로 보는 관점은 술에 대한 긍정적인 성경 구절에 잘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메시야 되심을 드러내신 첫 표적은 ‘양조(釀造)’였다.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으로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셨다. 또한 예수님은 사람들과 함께 포도주를 즐기셨고, 새 언약을 포도주로 재정하셨다.

술을 윤리로 보는 관점은 술에 대한 부정적인 성경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잠언 23장의 경우 심각한 술 취함에 대한 경고이다. 술 취함은 분명하게 윤리적으로 옳지 않으며 하나님 앞에서 죄이다. 사회법에서도 술을 몇 잔 즐기는 것은 문화로 보지만 주폭(酒暴)은 범죄로 보는 것과 비슷하다.

술에 대한 부정적인 성경 구절 중 나실인의 율례와 왕에게 주는 교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실인의 율례는 자원하여 하나님께 헌신하는 자에게 포도주 뿐만 아니라 포도열매도 먹지 않도록 요구했다. 또한 왕에게 포도주를 금한 것은 백성들을 제대로 돌보기 위해 식생활에서 어느 정도 금욕적인 생활을 요구했다. 두 경우 모두 지도자에게 요구하는 절제의 미덕이라 볼 수 있다.

한국 교회에서 술 문제와 관련하여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신앙 전통이 있다. 100년 전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술을 윤리적인 문제로 규정하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술을 윤리적인 문제로 인식한다. 술을 윤리적인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 사람들은 고민하지도 않는다.

나는 선교사들의 그런 결정이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도 유효한 결정이라 생각한다. 그들의 결정은 한국 교회에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술 문제는 이성문제, 재정문제, 폭력문제 등 너무나도 많은 문제를 끌고 들오는 악의 통로와 같기 때문이다.

■ 결론.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교회의 지도자들, 중직자들, 성숙한 자들의 경우에는 나실인의 서원, 왕에 대한 포도주 교훈, 바울의 절제 전통, 선교사들의 가르침을 따라 엄격한 절제가 성경의 가르침이다. 당연히 금주하는 것이 유익하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전 8:13).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 신앙을 가진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은 선교사들의 가르침을 따라 음주하는 사람은 절주, 절주하는 사람은 금주하는 방향이 바람직하다. 음주를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어짜피 한 순간에 술을 끊을 수도 없을 뿐더러 하나님과의 만남과 은혜가 먼저이기 때문이다.

음주에 자유로운 사람은 다른 크리스천에게 자신의 음주를 정당화하지 않도록 권하고 싶다. 약한 자의 믿음과 삶을 보호하기 위하여 음주를 정당화하는 발언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

단, 교회에서는 술 한 잔 하는 것에 대하여 지옥 갈 것처럼 정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쩔 수 없이 술 한 잔 받는 것에 대하여 배도한 것처럼 몰아가지 않기를 바란다. 과도하게 경직된 기준을 제시하다보니 성도들은 반감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자원하는 절제, 경건의 유익 보다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다.

■ 나의 이야기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내가 청년 때 술을 끊게 된 말씀이다. 성령 충만과 술 취함은 반대방향이다. 그 가운데 쯤 문화로서의 음주가 있다. 술 한 잔하면 한 잔 만큼 방탕한 방향으로 향하게 된다. 나는 그게 싫었다. 주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더 성령충만하기 위해서 술을 끊었다. 지금까지 후회가 없다.

예함교회 강하룡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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