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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물

김준곤목사

elimcy 2012. 11. 9. 21:26

김준곤 목사 신앙간증 1


  
저는 전라남도 신안군 지도라는 곳의 엄격한 유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6.25때 보니까 동네에서 우리 집만 빼고 전부 공산당이 되었습니다. 서울에 있다 6.25때 거기로 피난을 가보니까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안믿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족보에서 내 이름을 빼버린다고 호통을 치고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안믿고 돌아가실 때에는 내 앞에서 공산당이 아버지를 돌로 쳐서 머리가 다 깨지고 나중에는 입이 다 깨졌어요. 살아나서 다시 소리를 지르셨는데, 마지막 들은 얘기는 ‘천도(天道)가 무심합니다.’ 하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런 가정에서 제가 자랐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고기 잡는 배를 두 척 갖고 계셨는데, 사람들을 20여 명 고용하여 다른 곳에서 사업을 하셨고, 우리 집은 어머니가 머슴들을 데리고 농사를 지으셨는데, 소출이 나면 아버지가 오셔서 다 가져가 버리셨습니다. 부인을 따로 얻어 사셨는데,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는 참으로 여종처럼 사셨는데 그렇게 불쌍하고 가엾은 어머니가 없습니다. 물레를 짜면서 저녁 내내 바람소리를 들으며 슬픈 노래를 불렀던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어린 시절을 살았습니다.


내 신앙의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


제가 굉장한 신앙적 영향을 받은 아주머니인 문준경 전도사(편집자 주; 문준경 전도사에 관한 추모의 글은 「영원한 첫사랑과 생명언어」(김준곤 목사 지음, 순출판사)에 실려 있음)가 계셨는데, 그분은 우리 아버지와는 외사촌간이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일학년, 이학년을 다닐 때쯤 그분이 우리 집에 오셔서 어머니와 몇 밤씩 주무시면서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목청이 굉장히 좋으셔서, 육자배기처럼 아무렇게나 부르는 찬송이 듣기 좋고 신기해서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밤에 모여들었고, 강아지까지 따라 나왔던 생각도 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찬송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하는 것을 초등학교 일학년이던 내가 가만히 들어보면서 그분이 굉장히 무식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는 교과서인지 어딘지에서 4대 성자의 이름을 외우라고 하면 공자, 부처님, 소크라테스, 그리고 예수님이라고 배웠는데, 저분은 교육이 없는 분이니까 무식해서 저러나 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제가 최초로 예수님에 대해서 들은 것입니다.


또 한 번은 목포를 나갔다가 어떤 성당 앞에서 한 사람을 만났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그 사람이 신부였어요. 그때는 개신교니 천주교니 전혀 몰랐습니다. 서있는 나를 온유한 얼굴로 유심히 쳐다보면서 여기 와서 구경하지 않겠느냐고 하길래 따라서 들어가보니 예수님의 모든 사진들이 있는 가운데 십자가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지금도 그걸 잊을 수 없는데 진젠돌프의 이야기가 써진 것 같았습니다. ‘나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생명을 주건만 너는 나를 위해서 무엇하느냐.’라는 그런 비슷한 글이 쓰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거기서 나는 못박힌 사람처럼 서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너무너무 고맙고 감사해서…. 그런데 나중에는 수녀가 또 안내를 했는데, 그 수녀가 지상의 천사처럼 보였습니다. 지금도 ‘수녀’ 하면 굉장히 존경하는 아주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천주교인지 개신교인지 아무 개념이 없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돌아와서는 여기 예수 믿는 곳이 없는가 하고 찾아보았더니 서울에서 온 병원 가정하고 몇 가정이 기도를 드리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거기 좀 끼어 달라고, 입회비가 필요하면 내겠다고 하면서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장로교와의 인연을 갖게 되었는데 그 만남을 나중에는 잊어버렸습니다. 그 정도로밖에 예수를 접한 기억이 없습니다.


저는 농업실수학교라는 데를 다녔습니다. 그 학교의 일본인 교장이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제 성적은 언제나 참 좋은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글 쓰는 일은 무엇이든지 나보고 다 쓰라고 했었습니다. 저를 좋게 봐서 그랬는지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런 은혜를 입혀 주셨습니다. 그때 일본이 동양 정복을 위해서 세운 만주척식회사가 한국에 있었는데, 이 회사가 한국의 모든 토지를 수탈해갔습니다. 농사 지을 사람이 없으니까 한국 낙동강 유역의 홍수 때 발생한 수재민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100~300호 단위로 수천 개의 마을을 모두 만주로 이주시켰습니다.


만주에서의 청년시절


그런데 전남 도지사인지 농무국장인지 하는 사람이 전남에서 제가 다닌 그 농업학교를 나온 사람 가운데 만주에서 농산 기사로 지도할 한 사람을 전남에서 추천해 달라고 학교로 연락이 와서 제가 추천을 받아 가게 되었습니다. 가보니까 규모가 어마어마했습니다.


한 나라 정도의 규모만한 동만 일대의 지사장은 동경대학을 나온 사람이었고 그 지사장의 비서실장이 예수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 비서실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경건하고 신앙이 좋은 분으로 저에게 일본말 성경을 주면서 기도도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 늘 깊은 호감을 갖고 있던 터라 교회를 찾아 갔더니 어떤 권사님이 딸 하나를 데리고 교회에서 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목단강이라 하는 교회를 가니까 교회 사람들이 20~30명이 모였는데, 그 모임이 호감이 가고 좋고 기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권사님 댁에서 하숙을 하고 있는 동안에 조금씩 조금씩 예수님에 대해 매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비서실장과 친분 있는 사람으로 한국에 조선총독부의 치안국장까지 지낸 사람이 있었습니다. 동경대학을 나온 하루사라고 하는 사람이었는데, 말하자면 이들은 일본의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엘리트를 뽑아가지고 공작을 하기 위해 만주에 파견된 사람들로 중국에 진출한 후 몽고를 겨냥해 일본이 전략적으로 세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치 요셉이 가는 곳마다 곱게 보였던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이들이 굉장히 저를 좋게 보아가지고 조선총독부 총무과에서 한국사람 이민 후원하는 일을 제게 맡겼습니다. 어떤 분은 저를 예수 믿게 하려고 성경책도 사주고. 김치도 해주고, 세탁도 해주고 일 년 동안 아주 공을 들이기도 했습니다.


전쟁은 막바지로 접어들었습니다. 한국에 나와야 할 때가 되어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만주척식회사에서 후원을 했기 때문에 회사의 승인이 없이는 재산을 정리하고 한국에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쌀 한 가마니에 8원 하고, 국민학교 교사 월급이 15원 했을 시절이었는데 제가 돈을 얼마를 만들었냐 하면 2만원을 만들었습니다. 상상이 안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3원을 주더니 8원, 나중에는 80원까지 주어, 3배, 4배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번 2만원으로 그곳을 정리하고 한국에 가려고 했으나 결재가 나지 않아서 못나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하숙했던 집 권사님의 숨은 봉사, 의외로 고결한 인격을 가진 사람과의 만남, 그런 사람에게의 이끌림 등 여러 가지 요인이 합동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