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 감사 그리고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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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 목사 설교] 예수님의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까?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1-17)
할렐루야. 주의 성령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드릴 때에 모든 죄의 결박에서 놓여남을 받을 것입니다. 마음의 편안함이 다가오고 귀신이 쫓겨나가고 병이 고침 받는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 성령의 역사를 아시아에서 오신 각 나라 대표 여러분들이 여러분 나라로 가지고 가셔서 나라를 변화시켜 부흥시키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힘써주시길 바랍니다. 함께 인사 나누겠습니다. “오늘은 참으로 좋은 날입니다.” “사랑의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좋은 일이 있습니다.” 한 번뿐인 인생 주님 앞에 우리가 귀하게 쓰임 받아야 합니다. 주님 나를 주님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늘 우리의 순간순간 그러한 고백이 결단이 주님 앞에 드려져야 합니다. 한 번 지나가는 인생 속에서 헛되이 살지 말고 사나 죽으나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 나를 통해 영광 받아 주옵소서. 우리 고백으로 찬송합니다.
(복음성가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갈라디아서 6장 11절로 17절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의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와 같은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함께 따라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까?” 옛말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합니다. 이 세상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무언가 자기의 이름을 자기의 업적을 자기의 흔적을 남기며 살기 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굉장히 자기중심적이 돼서 누가 자기를 칭찬하고 인정하고 자기를 알아줄 때에는 참 기쁘고 너무 좋아서 열심을 다하여 자기 일을 잘 감당하다가도 누가 나를 뭐라고 비난하고 나에 대해서 좋지 않게 이야기하고 하면 쉽게 상처받고 낙심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뭔가 달리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까 이제부터는 우리의 삶속에서 우리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몸 버려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나의 흔적 나의 자랑이 남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흔적, 예수님의 자랑거리가 남게 되길 바랍니다.
제가 연초에 기독교 TV하고 인터뷰하는 그러한 시간이 있었는데요. 한 시간 인터뷰가 끝나면서 마지막에 묻더라고요. “목사님, 목사님께서는 이렇게 큰 교회를 담임하고 계신데 목회를 다 마치고 나서 어떤 목회자로 기억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때 제가 이렇게 대답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사역을 마치고 은퇴할 때 저의 이름은 기억되지 않고 예수님의 흔적만 남길 원합니다.” 여러분 일생 살아가는 동안 여러분의 모습이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의 흔적이 남겨있게 되길 바랍니다. 어디에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하기 전에 그 자리에서 여러분이 지나가는 자리에 예수님의 흔적이 남겨져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가진 것들을 자랑합니다. 자신의 육체의 흔적들을 자랑합니다.
1. 육체의 자랑
먼저 육체의 자랑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12절, 13절에 이와 같은 고백이 있습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이 말씀이 무슨 말인고 하니 당시에 갈라디아 교회에 잘못된 가르침을 가르치는 그러한 율법주의자들이 들어왔어요. 거짓 선생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당신들이 예수를 믿는 것만 갖고 구원을 받는 게 아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너희들이 몸에다가 율법을 지킨다는 흔적을 남겨 가지고 그 흔적이 구원받는 표시로 나타내야 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받는 할례를 예수를 믿는 이방인들도 받게 하려고 했습니다. 처음 교회를 나온 분들은 혼돈이 됐어요. 먼저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고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이 와서 가르쳐 주기를 할례를 받아야 된다. 몸에 흔적을 남겨야 된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동요가 왔습니다. 그때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우리가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지 우리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로 우리의 삶의 어떤 흔적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주님 은혜에 감사해서 불쌍한 사람들도 도와주고 또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가서 살펴서 예수의 사랑을 전하고 이렇게 행위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지 순서가 바뀌면 안 됩니다. 내가 헌금을 많이 했기 때문에 구원받고 교회에서 봉사를 많이 했기 때문에 구원받고 내가 선을 많이 베풀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그것이 아닙니다. 이 잘못된 가르침을 가르친 사람들은 마치 유대교의 바리새인들과 같았어요. 바리새인들은 늘 행위를 자랑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있는 데서 서서 기도하면서 “하나님 내가 일주일에 이틀씩이나 금식을 합니다.” “내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립니다.”, “내가 모든 율법을 다 지켜 행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조금도 잘못된 길로 가지 아니하고 거룩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 자랑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하나님과 멀어져 있었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보다는 자기를 나타내고자 하는 이기주의적인 모습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라고 하는 우상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자기자랑을 하면 안 됩니다. 내가 열심히 나가서 전도했더니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나로 인해서 교회를 오게 되고 내가 봉사를 했더니 이 부서가 크게 부흥을 하게 되었고 내가 이랬더니 이렇게 되고 내가! 내가! 내가! 예수님이 보이지 않아요. 우리의 말이 바뀌어야 됩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내가 구역을 섬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내가 남선교회 들어와서 여선교회 들어와서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내게 재능을 주셔서 내가 성가대 들어와서 내가 오케스트라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누구의 은혜로? 예수님의 은혜로. 여러분 행위를 자랑하는 사람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갈라디아 교회에 잘못된 가르침을 가르치는 이 사람들이 바로 그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자꾸 자신들의 행위를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그 모습 속에서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흔히 남보다 가진 것이 더 많으면 그것을 가지고 자랑합니다. 물질이 많은 사람은 그 물질이 자랑입니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물질이 없는 사람을 업신여깁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은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은 힘없고 빽 없는 사람들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어요.
그러나 그것이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무엇이 영원합니까? 예수님의 사랑이. 예수님의 은혜가. 예수님의 기적이.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영원한 것입니다. 세상 것을 자랑하며 살면 주님이 점점 멀어집니다. 그러나 주님을 자랑하고 주님을 높이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직 예수님만 높이고 예수님만 자랑하고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그런데 이제 행위라고 하는 함정이 어디에서 문제가 되느냐? 죄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죄의식을 갖고 있어요. 세상에 나가 살면서 생각으로 죄를 짓고 말로 죄를 짓고 행동으로 죄를 짓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당신 선한 일을 많이 하면 그 죄가 사함 받는다.” 그렇게 가르쳐 주면 “어휴, 내 죄 사함 받기 위해서 열심히 내가 선한 일을 해야지. 열심히 구제도 하고. 열심히 봉사도 하고. 열심히 내가 교회에 맡겨진 일에 충성을 해야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이러한 행위라고 하는 잘못된 신앙에 빠지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행위는 받은바 은혜에 감사해서 주님께 드리는 것이지 행위 때문에 내가 구원받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래서 이 구원의 진리를 전할 때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받고 나서 우리는 선한 삶을 살아야 됩니다. 선한 행위를 나타내야 됩니다. 이렇게 전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이유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당시 성 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해서 많은 헌금이 필요했는데 테첼(John Tetzel)이라고 하는 신부가 다니면서 죄사함을 받는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카톨릭 교리에서 죄를 지었을 때 참회하고 나와서 기도하면 죄를 용서를 받지만은 죄의 벌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 벌을 면하기 위해서는 선한 일을 해야 된다.
그래서 죄를 사하기 위해서 선한 일을 해야 되는데 문제는 너무나 일이 바쁘고 할 일이 남아있는 분들은 그 선한 일을 교회서 대신 해달라고 교회에다가 헌금을 내게 됩니다. “헌금을 낼 테니까 이 헌금으로 선한 일을 하게 해주세요.” 그렇게 되니까 죄사함을 받는 면죄부를 팔 때 너도나도 헌금을 많이 했어요. 헌금을 내고 내가 죄 사함을 받았다하는 마음의 평안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교리에 이런 이유가 있어요. 우리가 죄짓고 나서 주님 앞에 나와서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하고 죄 사함 받고 돌아서 죄짓고 또 죄짓고 또 죄짓는 그러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죄짓고 나서 회개하고 나서 선한 일을 그만큼해서 갚아야 된다 하는 행위로 보상하는 그러한 교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 빠진 것입니다. 물론 죄를 습관적으로 지으면 안 되죠. 그런데 테첼이라고 하는 사람은 헌금을 많이 내면 천국가지 못한 영혼도 헌금 내는 헌금 낼 때 동시에 천국으로 올라간다고 했어요. 그러니 부모님을 잘 섬기고 사랑했던 자녀들이 부모님이 천국가지 못했다고 생각할 때에는 헌금을 많이 낼 수밖에 없죠. 그래서 문제가 커진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1517년 10월 31일, 95개조의 항목을 갖다가 써서 루텐베르그 성당 앞에 붙이고 이 카톨릭 교리에 문제점을 지적하고 종교개혁이 일어나서 오늘날 기독교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받고 난 다음 우리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2. 우리의 자랑
둘째로 우리의 자랑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이와 같은 고백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사람마다 자랑거리가 있죠. 자기의 가문을 자랑하기도 하고 지식을 자랑하기도 하고 재능을 자랑하기도 하고 부모를 자랑하기도 하고 자녀를 자랑하기도 하고 자랑하죠. 사도 바울도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서 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자였고, 또 최고학파인 가말리엘 학파에서 공부도 하고,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었어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베냐민 지파요, 바리새인이요. 그런데 그가 예수를 믿고 난 다음 이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다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니까 그 모든 자랑거리가 다 헛되고 헛된 것이에요. 그의 삶에 예수님밖에 자랑거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이와 같은 고백을 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할렐루야.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얼마나 주님 은혜 감사한지. 내 삶의 유일한 자랑거리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날 위해 몸 버려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주님 나와 함께 하여 주옵소서. 여러분의 삶이 그와 같은 삶이되길 바랍니다.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만 자랑하고 십자가만 증거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십자가에서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십자가에서 영생의 길이 열렸습니다. 십자가에서 가난과 저주가 사라졌습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병이 고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천국 문이 열렸습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에 보면,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의 길이 열렸습니다.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 목사님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역사의 단 한 가지 불가항력적인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모든 것의 중심이다. 십자가는 우리의 전부이다. 다른 모든 것은 거기에 종속될 뿐이다. 이 십자가에 인생을 거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몸에 흔적을 내서 할례를 받았던지 안 받았던지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새로 변화된 이 놀라운 은혜가 그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6장 15절에 보면,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할렐루야. 여러분 예수 믿고 나서 예수님만 자랑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만 높이시길 바랍니다. 예수님만 닮아 가시길 바랍니다. 절대로 내가 무엇을 했다고 여러분 자신을 자랑하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제가 1973년 대학교 들어갔을 때에 교회학교 교사로 있었는데요. 그때 초등학교 6학년 얘 성가대원 가운데 성결교회에서 교회를 다니다가 우리 교회로 온 학생이 있었어요. 집이 마포인데 심방을 가니까 그 어머니가 이야기를 해주시더라고요. 오빠 둘이 중학교 3학년, 2학년 그 다음에 얘가 초등학교 6학년인데, 온 자녀들을 다 우리 교회로 보냈어요. “목사님! 저희는 문화촌의 성결교회를 섬기고 있는 가정입니다. 이 아이들의 아빠가 그 교회 장로님이시고 그 교회를 지을 때 헌금을 많이 내서 교회를 지어서 성도님들이 다 그 장로님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그랬는데 어느 날, 장로님이 교회 마당에 나가서 얘들끼리 노는걸 보는데 자기 딸이 아이들과 뭘 하다가 뭐가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았던가 봐요.
그랬더니 자기 딸이 하는 말이 ”나한테 함부로 하지 말어. 우리 아빠가 이 교회 지었어.” 어휴, 그 장로님이 큰 충격을 받았데요. 아니 아이들이 이 교회는 주님의 은혜로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인데 아빠가 지은 교회라고 날 함부로 하지 말라고. 그래서 저희 장로님이 결단을 내려서 이 아이들 셋을 순복음교회로 보내 신앙생활을 바로하고 오게 하라고 보냈습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 와서 신앙생활을 하고 한참 지난 후에 다시 자기 교회로 돌아갔어요. 그 아버님 신앙이 얼마나 훌륭한지 몰라요. 자녀들이 잘못될까봐 자녀들을 본인이 희생해서 지어진 교회에 주님 영광 가릴까봐 순복음교회로 보내셨어요. 이 자매가요, 35년 후에 저한테 연락이 왔어요. 미국 L.A.에 사는데 “목사님, 저 아무개인데 기억하시겠습니까?” “네, 기억하지요.” “제 아버지가 저에게 한국의 땅 2만평을 유산으로 물려줬는데 양로원을 짓고 싶은데 제가 할 수 없으니까 목사님께 드릴 테니 목사님께서 양로원을 좀 지어주세요.” 그래가지고 서울에 와서 땅문서를 저한테 주고 가셨어요. 할렐루야.
그래서 그 2만평 땅을 해남 땅끝마을에 있는 그 땅인데 가보니까 앞은 바다고 뒤는 산이고, 너무나 좋은 땅이에요. 그래서 제가 기도하는 가운데 특별히 우리나라에 많은 목사님들, 또 선교사님들이 은퇴하고 나셔서 가실 데가 없는 분들을 위해서 은퇴 교역자 숙소를 지어야 되겠다. 그래서 전라남북도에 있는 목사님들 모시기위해서 거기다 하나 짓고 또 경기도 서울지역에 있는 분들을 위해서는 안성 땅에 우리 장로님이 땅을 기증하셔가지고 거기다가 Good People을 중심으로 해서 Good People Silver House를 지금 짓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연말이면 먼저 은퇴교역자 숙소 1호가 먼저 완성이 됩니다. 한 120여 분을 모실수가 있어요. 아주 좋은 지역에 잘 짓고 있는데 성도님들이 어떻게 소식을 듣고 한 분 두 분 헌금해 주셔가지고 그 헌금이 쌓여져서 은퇴 교역자 숙소를 짓고 있고요. 전국에 한 여섯 군데를 지어서 각 지역마다 은퇴해서 가실 데가 없는 목사님, 평생 교회를 섬기셨는데 가실 데가 없어요. 우리 한국의 교회 5만 4천교회인데 약 70%, 80%의 교회 목사님들이 은퇴 후에 가실 데가 없데요. 그래서 곳곳에 은퇴 교역자 숙소를 지어서 평생 주님을 위해서 섬기신 분들을 섬기기 원하는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때 이와 같은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자랑은 오직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나아가서 우리 일생 살아가는 동안 우리 삶 가운데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고 살아가는 주님의 일군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기 원합니다.”
3. 예수님의 흔적
셋째로 예수님의 흔적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 사도 바울이 고백합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할렐루야. 여러분, 여러분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습니까? ‘흔적’이라고 하는 말이 헬라어로 ‘스티그마’라고 하는데 ‘스티그마’라고 하는 말은 ‘낙인찍었다. 낙인’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낙인’당시 노예제도가 있었는데요. 노예는 다 주인의 소유입니다. 그런데 노예가 너무 일이 힘들다고 도망을 가면 이제 찾아서 붙잡아 오는데 주인이 노예를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어요. 그때 대부분 주인들이 다시는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고 불로 지져서 몸에 낙인을 찍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의 소유다.’ 하고 콱! 찍어요. 만약 주인이 김 씨이면 ‘김 아무개 소유’ 라고 콱! 찍어놓습니다. 그래서 이 노예가 어디를 도망가든지 간에 이 낙인을 보면 다시 붙잡아서 그 주인한테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시대에 황제에게 충성하느라고 장군들이 몸에다 낙인을 찍었어요. ‘나는 왕에게 절대 충성한다.’ 낙인을 찍었습니다. 그래서 낙인을 한 번 찍으면 평생 지워지지가 않아요. 이 낙인을 찍었다고 하는 의미는 “내 일생 다가도록 지울 수 없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흔적을 내가 갖고 있습니다. 내 일생 다 바쳐 주님만 사랑하고 주님만 의지하고 주님만 따라가고 주님만 전하고 주님 위해 살다가 주님 앞에 가기 원합니다.” 이와 같은 흔적이 그 삶 가운데 남겨져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섬기다가 많은 고난을 통해서 육신에도 큰 흔적이 남게 되고 그 삶 가운데, 그의 일생 가운데 많은 흔적이 남게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절에서 27절에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와 같은 사랑의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 고난이 주님을 향한 사랑의 흔적이었습니다. 수없이 맞고 감옥에도 갇히고. 그러나 주님을 향한 주님의 그 뜨거운 사랑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일생 바쳐 주님 앞에 헌신한 귀한 종이 되었습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 불리는 손양원 목사님. 평생 나환자를 섬겼어요. 그런데 나환자에게 다가가면 나환자들이 놀래서 뒤로 도망갑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가서 정말 그들을 섬기고 피고름을 입술로 빨아내고 하는 그 모습에 모두가 감동되었어요. 이런 고백을 하셨어요. “차라리 내가 나병에 걸렸으면 좋겠다. 그리 되면 저들처럼 가까이 오지 말라고 뒷걸음치는 환자가 없지 않겠는가? 언제라도 그들과 함께 웃고 떠들고 뛰놀 수 있지 않겠는가?”
여수, 순천 반란사건 때 공산폭도가 목사님의 두 아들을 죽였습니다. 동인이, 동신이를 죽였습니다. 그 죽인 공산폭도가 나중에 붙잡혀서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안재선이라고 하는 청년인데, 그런데 손양원 목사님이 그 재판하는데 딸을 보내가지고 딸에게 얘기를 전달하라고 합니다. 그 사람을 사형시키지 말고 손 목사님이 양아들로 삼을 테니까 그를 놔달라고. 딸이 울면서 아빠에게 대듭니다. “아빠, 아빠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요. 우리 오빠를 죽인 사람을 내가 어떻게 용서하고 오빠로 맞이할 수가 있어요?” “아니다. 가서 이 말을 꼭 전달을 해라.”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내가 일제시대 5년간이나 가족을 고생시켜가며 감옥생활을 견딘 것도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주님의 계명을 어기지 않으려고 한 일이었다. 제 1계명, 제 2계명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똑같은 하나님의 명령인데 어느 것은 순종하면서 어느 것은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큰 모순이 어디 있겠니? 원수를 사랑하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과거 5년 동안 감옥생활 한 것이 모두 다 헛수고요 너희를 고생시킨 것도 헛고생이 되는 것이니 나는 여기서 넘어질 수가 없구나. 두 오빠는 천국 갔으나 그를 죽인 자는 지옥 갈 게 분명한데 전도하는 목사로서 그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을 어떻게 보고 있으란 말이냐"
위대한 사랑의 사도입니다. 어떻게 자기 아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하고 자기 아들로 삼을 수가 있어요. 그 목사님이 6.25전쟁 때 공산군에 의해 순교당하고 맙니다. 여러분, 정말 예수 사랑의 흔적을 남긴 귀한 종으로 길이길이 기억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얘가 나가서 친구들과 싸우다가 매 맞고 들어오면 “어떤 놈이야? 내가 가서 때려줄 거야.” 그래서 아이가 한 대 맞고 오면 어른이 가서 어른 싸움 되가지고 크게 화를 내고 나가서 대신 싸우는데. 이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해서 양아들로 삼은 그 귀한 목사님. 정말 우리가 예수 사랑의 흔적을 갖고 있는지. 정말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마음을 갖고 살아야 되는데 우리는 용서하지 못해요. 나에게 상처 입힌 사람을 절대 용서하지 못하고 마음에 미움과 분노로 평생 동안 아파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마음에 상처가 너무 깊다 그 말이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아낌없이 몸 버려 피 흘려 돌아가셨는데, 우리의 모습은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지금은 천국가신 충현교회 김창인 목사님. 우리 목사님이 여러 차례 간증하셨던 이창완 전도사님 이야기를 오늘 소개하기 원합니다. 이창완 전도사님이 18살 때 이제 세례를 받았어요. 우리로 말하면 침례를 받았는데 침례를 받을 때 문답을 하잖아요. 문답을 받을 때 정말 이창완 청년이 기도 많이 하고, 준비하고 나서 세례 문답을 합니다. 그런데 워낙 믿음이 좋고 기도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김창인 목사님이 세례 문답할 때, 보통 세례 문답할 때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믿습니까?’ 이런 문답하잖아요. 다른 거 안 묻고 이렇게 물었답니다. “창완아, 너 성경 몇 번이나 읽었니?” “아이, 목사님. 뭐 부끄럽게 자꾸 그런 걸 물어보세요?” “세례 문답을 하는 질문이니까 대답을 해야 한다. 몇 번 읽었니?” “부끄럽게 왜 물으세요?” “글쎄, 몇 번 읽었냐니까?” “예, 저 40번 읽었습니다.” “야, 대단하구나. 너 나랑 목사 바꾸자.” 그게 세례문답 다예요.
1948년 12월. 이제 김창인 목사님이 월남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젊으신 목사님이시니까 이창완 전도사가 늘 “형님, 형님” 했는데, “창완아, 네가 나보다 설교도 잘하고 영성이 깊으니까 내려가서 목회해라.” “아닙니다. 형님, 형님은 결혼해서 가족이 있고 또 미리 월남한 사람들이 다 형님 목사님을 기다리고 있지 나 이 전도사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니까 형님이 가십시오.” 일주일동안 서로 “자네가 가라.” “어휴, 형님 목사님이 가십시오.” 밀고 당기다가 이제 김창인 목사님이 가족을 데리고 월남을 하시고 얼마 있지 않아서 공산당이 들어와서 “김창인 목사 어디 있느냐?”고 붙잡으러 왔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고 월남한 것을 알았어요. 가족이 싹 월남 한 것을 알고 “이 반동분자, 남쪽으로 도망갔구먼.” 하고 이창완 전도사를 대신 붙잡아서 경찰서로 끌고 갑니다. 경찰서로 끌고 가서 “이 악질분자니까 죽는 것도 고통 가운데 죽여야 된다”고. 그래서 추운 겨울, 북한의 겨울이 얼마나 추운지 콧물 흘리면 콧물이 내리다가 얼어버리는 그렇게 추운 영하 30도가 되는 겨울에 경찰서 마당에 큰 독을 갖다가 놓고 벌거벗겨서 집어넣고 물을 부어서 얼려 죽였어요. 그런데 이 전도사님이 물이 얼어들어 올 때 찬송을 부릅니다. 성도들이 따라와서 같이 통곡하며 찬송을 부르는 가운데 우리 이창완 전도사님이 천국 가시는데요.
(찬송가 493장).
점점, 점점 소리가 약해지면서 찬송 속에 조용히 천국을 가셨습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성도들이 와서 그 독을 가져다가 양지 바른 곳에 가서 독을 깨서 얼음을 깨고 그 전도사님을 묻었습니다. 이것이 그 전도사님이 남긴 예수 사랑의 흔적이었습니다. 그분은 비록 그렇게 물에 얼어 순교했지만 그가 남긴 예수 사랑의 흔적이 지금까지 그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남길 예수 사랑의 흔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너무나 지금까지 나만을 위해 살아왔어요. 내 가진 것, 나를 지키기 위해서 너무나 애쓰고 힘써왔고 예수님 사랑, 예수님의 흔적보다 나의 흔적을 남기기에 힘써왔던 우리들의 모습.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이제 우리가 새롭게 결단해야 됩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이제 내 삶, 나의 남은 삶에 오직 예수 사랑의 흔적만 남기기 원합니다. 내가 내 자랑을 하지 아니하고 예수님만 높이고 예수님만 자랑하고 예수님만 닮아가고. 우리 주위의 가난하고 불쌍하고 소외되고 병든 사람들에게 이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며 살다가 주님 앞에 가기 원합니다. 이와 같은 사랑의 흔적을 남기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