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 감사 그리고 감사...
[스크랩] 이럴 때에는 교회를 옮겨야 한다. - 학자의 혀 본문
이럴 때에는 교회를 옮겨야 한다.
교회를 옮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가?
교회를 옮기는 것을 괴로워하며 고민하는 성도들에게...
학자의 혀
많은 성도들이 교회 생활을 하면서 닥치는 고민 중 가장 크고 괴로운 것은 ‘교회를 옮기는 문제’이다. 아마 이것에 대해서 한 번도 고민해 보지 않은 성도들이 없을 것이며, 수없이 반복하고 있는 고민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동안의 삶의 터전과 같은 교회를 옮긴다는 것이 쉽지 않기에 마음은 이미 떠났지만 단지 몸만 머물러 있는 슬프고 우울한 교회생활을 하는 분들이 많다. 개인적으로 그런 분들을 볼 때면 그들의 영혼의 답답함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안타까움과 답답함이 더한다.
성도들이 교회를 옮기는 고민을 하게 되기 까지는 한두 가지 이상의 적지 않은 문제들이 복합적인 원인을 제공하고, 장시간에 걸친 반복되는 아픔의 과정이 있다. 그런 면에 있어서 진정한 성도가 아닌 단지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은 고민이나 아픔 따위는 없다. 그냥 아무렇지 않게 교회를 옮겨 다닌다. 성숙한 신자라면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서는 교회 옮기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 만약 별것 아닌 문제(예를 들어 교회에서의 다툼이나 기타 사소한 문제들) 때문에 교회 옮기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당사자에게 문제가 더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실한 성도들은 교회 옮기는 것을 쉽게 생각하지 않는다. 교회를 옮기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기 까지는 오랜 시간 수많은 고통과 눈물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성도들은 교회를 옮기는 문제를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그리고 괴로워 한다. 성도들이 교회를 옮기지 못하는 이유는 몇 가지 있다. 현실적으로는 기존에 형성되어 고착된 나의 삶의 기반과 안정을 뒤로하고 불확실한 어떤 곳을 향한다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고, 또 새롭게 등록하게 된 교회에서 적응을 한다는 일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한 어려움은 나이가 들수록 크게 다가오기 때문에 나이가 많아질수록 불만족스러운 현실이지만 체념한채 교회생활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 교회생활은 기쁨과 은혜가 아닌 고통과 괴로움과 말 못할 답답함에 갇혀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것이다. 교회 생활은 우리 영혼과 삶의 모든 문제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 요소이므로 그러한 상황에 있는 성도의 괴로움과 영적 피폐함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성도들이 교회를 옮기지 못하는 이유 중에 가장 크고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원칙(原則)과 대의(大義) 때문이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섭리하시고 다스리심을 믿기에 나의 삶의 모든 것도 섭리하시고 다스리심을 믿는다. 그러므로 성도는 지금 본인이 출석하고 있는 교회를 인도하신 분도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결국 지금 출석하고 있는 교회의 형편과 상황이 어떠하더라도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이 교회를 계속해서 출석하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만약에 이 교회를 더 이상 출석하지 않고 옮기게 된다면 그것은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위배하는 것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이 교회로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이 교회를 옮기는 데 있어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가장 크고도 직접적인 이유이다. 그러므로 신실한 성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괴로움과 고통도 크다. 교회를 옮기고자 하는 마음이 큰 만큼 교회를 옮길 수 없다는 하나님에 대한 충성의 마음도 크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 서로 충돌하는 성도의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괴로운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 할 수록 더 큰 고통과 괴로움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아니러니한 현실 속에 눈물짓게 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뜻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욕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들에게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겠지만 진짜 성도는 바로 여기에서 막히게 된다. 나도 이와 같은 생각으로 괴로워했었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 일어나는 일은 단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지금 이 교회로 나오기 까지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생명을 버리면서까지라도 교회를 지키고 사랑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과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원칙적으로 하나님의 뜻은 인도하신 곳을 섭리로 믿고 충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언제나 근본적이고도 1차적인 하나님의 뜻은 ‘성경’이다. 우리는 ‘상황’을 ‘하나님의 뜻’과 동일시 할 때가 많다. 물론 많은 경우에 아니 대부분의 경우의 상황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는 않다. ‘상황’보다 우선하는 것이 ‘성경’이기 때문이다. 지금 상황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지만 ‘성경’이 ‘상황’과 다르다면 ‘상황’이 아닌 ‘성경’이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지금 내가 출석하는 교회는 상황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맞다. 하지만 내가 출석하는 교회가 근본적이고 1차적인 하나님의 뜻인 ‘성경’에 위배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를 옮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지금의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만, 지금의 교회가 성경에 위배되는 가르침을 가르치거나 성경에 위배되는 행위를 지속적으로 한다면 그리고 개선(회개)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이다. 그러할 때는 그 교회에 남아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그 교회보다 더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며 순종하는 교회로 옮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교회의 담임 목사가 성경에 위배되는 가르침을 가르치고 그것을 교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말 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이다. 그런 교회라면 지금 당장 교회를 떠나서 성경에 합당한 가르침을 가르치는 교회로 옮겨야 한다.
혹은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지 않는 목회자가 시무하는 교회도 심각하게 고려해 봐야 한다. 아울러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행하지 않는 교회도 고려해야 한다. 물론 모든 목회자와 모든 교회가 항상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고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기준과 잣대를 지나치게 적용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성도의 입장에서 보기에 명백한 성경 위반과 미성숙한 가르침이 지나치게 많거나 오랜시간 지속된다면 그리고 그것이 개선(회개)될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때는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 성도 자신에게 유익이 없으며, 괴로움과 아픔만 가중(加重)될 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도 아니며 영광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와 같은 판단을 함에 있어서 전문가(목회자 혹은 신학자)의 도움을 받는 것이 훨씬 바람직 할 것이다.
마냥 지금 교회에 머물러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을 무시한채 지금 속하게 된 지금의 교회에서 맹목적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는 교회에 가서 바르게 배워 하나님의 사람으로 더욱 온전케 되어가는 것이다. 오히려 성경의 바른 가르침을 따라 과감하게 행동하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소심함이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더 악하고 배은망덕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일반 성도들은 성경의 바른 가르침을 분별할만한 지식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른 목회자를 만나는 일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하는 것이 여기서 다시 인식된다. 세상에서 가장 복된 일은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는 목회자를 만나는 일이다.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는 것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성’이다. 성경 해석은 역사성에 있어서 빗나갈 일이 거의 없다. 그것은 거의 희박한 일이다. 그러므로 역사성을 갖는 성경해석인 개혁주의 신조와 요리문답서를 시금석으로 적극 활용하여 의심되는 목회자의 가르침을 확인해야 한다.
어떤 목회자들은 이와 같은 나의 의견에 불평하고 원망 할 것이다. 교회를 옮기는 일에 대해 그렇게 쉽게 이야기 한다면 많은 성도들이 용기를 얻어 더 쉽게 옮기게 되며, 어떤 목회자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의 목자장이신 예수님의 기준은 나의 예상 보다 훨씬 더 엄격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불평과 불만으로 안주하고 기득권을 챙기려 애쓸 것이 아니라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순종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고 몸부림쳐야 할지를 생각하는 것이 그 본분에 합당한 자세라고 믿는다. 자기의 본분이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영혼의 귀중함을 다시 한 번 인식한다면 어떤 목회자들도 이와 같은 의견에 대해 불평할 수 없을 것이다.
로마 카톨릭이 교회 내에서의 계급을 두고 사제(신부)가 중보자가 되고, 축성권(그리스도의 몸을 다시 희생 제물로 드리는)도 가지고 있으며, 사죄권도 가지고 있는 이단 중에 이단적인 사상을 가르치는 반면 UBF, 네비게이토 같은 선교단체들 그리고 형제교회, 퀘이커교 같은 이단은 '만인사제주의'를 지나치게 적용하여 목회자의 역할에 대해 무시한 채 목사제도를 부정하는 모습을 보이나 그들의 주장은 오류이다. 만인사제주의의 핵심은 완전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안에 있는 모든 자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지 목사제도를 부정하는 것이 그 의미는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목사직은 주님께서 친히 세우신 것이 때문이다. 주님께서 목사직을 두신 이유 중에 하나는 성도들은 성경을 바르게 해석 할 능력과 지식을 갖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목회자 의존적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목회자가 그리스도의 종이요, 그리스도의 사역자요, 그리스도의 집의 집사요(빌1:1, 고전4:1, 고후3:6) 하나님의 보내신 사자요(계2:1), 그리스도의 사신 혹은 복음의 사신이요(고후5:20, 엡6:20) 교사요(딛1:9, 딤전2:7, 딤후1:11) 오묘한 도를 맡은 청지기(눅12:42)이기 때문이다. 이는 로마 카톨릭과 같이 계급을 가리켜 칭함이 아니고 다만 각양 책임을 가리켜 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교회에 교사(목사)의 직분을 두셨고(엡4:11), 목회자들로 하여금 성도들을 먹이게 하셨으며(마24:45), 선생된 자들이 받을 심판이 더 크고(약3:1),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더 많은 양들이 지옥 자식이 되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마23:15).
성도들이 목회자로부터 성경의 바른 가르침을 받기 위해 많은 시간 인내했으나 더 이상은 그런 기대를 하기 어려워지는 순간 교회 옮기는 것을 심각히 고려해야 한다.
다만 교회를 옮길 때의 근본 원인이 성경을 바르게 가르침 받지 못하는 것이었으므로 교회를 옮길 때에는 반드시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며 순종하는 교사가 목회하는 교회여야만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살후3:6]
목회자들은 자신이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고 있는지 역사적 성경해석인 개혁주의 신조와 요리문답에 비추어 늘 점검해야 할 것이며, 성도들은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는 목회자를 만나는 일이 복인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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