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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찬송가의 성서적 근거
이천진 목사 (이화미디어고등학교 교목)
1. 시편의 성격과 한국찬송가
시편은 성문서 중에서 대표적인 책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박준서는 시편의 성격에 대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양한 노래’라고 밝히고 있다.
시편의 책의 이름을 고찰해 보면, 히브리어로는 테히림(Tehillim-מילהת)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말은 ‘찬양’, 혹은 ‘찬양의 노래’라는 의미이다. 시편에 수록된 시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라는 뜻이다. 이 책의 제목은 ‘70인역’(Septuagint)에서 희랍어로 번역될 때, Psalmoi(살모이-Ψαλμοι)라고 붙여졌다. Psalmoi라는 말은 ‘줄이 있는 악기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들’이라는 뜻이다. 즉 희랍어의 제목은 시편의 시들이 단순히 읽혀진 것이 아니라, 악기에 맞추어 불리워진 노래들이라는 점을 강조해 주고 있다.
앤더슨(Bernard W. Anderson)도 시편은 찬송가로 찬양되었다고 하였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회당으로부터 아주 근본적인 영향을 받았다. 이 회당에서 시편은 성서로서 읽히기도 했고, 기도문으로 암송되었으며, 혹은 찬송가로 찬양되기도 했다.
시편은 단순한 시가 아니라, 찬송가였던 것이다. 그래서 150편의 시편은 5개의 부 parts, 혹은 책 books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5개의 부가 모두 문학적인 관련이 없는 송영으로 끝난다. 앤더슨(Bernard W. Anderson)은 시편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책 Ⅰ 시편 1~41편
결론 송영 : 시편 41:13
책 Ⅱ 시편 42~72편
결론 송영 : 시편 72:18-19
책 Ⅲ 시편 73~89편
결론 송영 : 시편 89:52
책 Ⅳ 시편 90~106편
결론 송영 시편 106:48
책 Ⅴ 시편 107~150편
결론 송영 (시편서 전체의) : 시편 150편
이렇게 볼 때 시편서를 제2성전 시대의 찬송가책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할 것이다. 이는 현대 교회의 찬송가책이 많은 시대를 거쳐 내려온 찬양시를 포함하는 이전의 찬송가 모음집에 기초해서 상당히 후대에 재배열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것이다.
모빙켈(Sigmund Mowinckel)도 구약성서의 시편은 모두 이스라엘 예배 공동체의 노래라고 하였다. 그리고 박준서는 “시편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향해서 드린 이스라엘의 기도 형태로 되어 있다”고 하면서 “시편에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향해 말하였던 이스라엘의 목소리가 수록되어 있고, 그들의 신앙과 경건이 수록되어 있다고 하였다.” 시편은 히브리인들의 찬송가인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편이라는 히브리 찬송가를 부를 때, 자신들의 신앙고백을 자신의 목소리에 자신들의 경건을 담아 불렀던 것이다. 즉, 그들의 찬송가 속에는 히브리인들의 신앙고백이 담겨 있었고, ‘히브리적 경건’, 즉 ‘히브리적 영성’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곡은 오로지 구전에 의해서 전수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는 견해가 있고, 김경선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고백을 히브리적 가락에 담아 부른 것이 확실하다고 밝히고 있다.
다만 시편이 당시 널리 알려져 있던 민요곡에 맞추어 불려지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확실한 듯하다. 왜냐하면 시편 표제나 머리글에는 ‘마스길’(mas-chil)이란 말이 나오는데 (시45, 69, 80편) 이것은 ‘백합화 곡조’라는 뜻이요, 시편 60편 머리글에 나오는 ‘수산에돗’(shu-shan-e-duth)은 시편 45, 69, 80편에 나오는 ‘소산님’이나 ‘소산님에돗’과 같은 뜻으로 시편 69편 주석에는 ‘백합화 곡조’라고 되어 있는데 ‘결혼의 노래’(bridal song)라고 데니슨(Dennison)의 성서사전에서 풀이하고 있다. (중략) 다음으로 시편 57, 58, 59, 75편에 나오는 ‘알다스헷’은 ‘멸하지 말라’는 곡명을 말하고 있고, 시편 22편의 ‘아앨렛샤할’은 ‘새벽의 암사슴’이란 곡명을 말하고 있으며, 시편 56편에 나오는 ‘요낫 엘렘 르호김’은 ‘먼 곳에 있는 병아리 비둘기’ 곡명이라는 뜻으로 불리었다고 알려져 있다. 학자들의 해석에 의하면 이 노래들은 당시 민요의 초구(初句) 또는 주제 등이며, 그 외에도 시편 9편의 주제 곡명으로 되어 있는 ‘뭇랍벤’이나 53편에 나오는 ‘마할랏’ 곡명, 그리고 2편과 77편 등에 나오는 ‘여두둔’ 등 풀기 어려운 노래곡이나 노래 방식까지 등장시켰다. 어쨋든지 옛날 유대인들은 민요곡을 성별하여 다윗의 시와 결합시켜 하느님께 바쳤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조숙자와 조명자도 “시편의 표제 중에는 히브리인에게 친숙한 민요곡으로 생각되는 곡명이 몇 편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시편을 대중적인 민요곡조로 불렀으리라는 추측은 퍽 흥미 있다.”고 하였다.
가령 시편 제57, 58, 59, 75편의 표제에 ‘알다스헷’의 곡조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로 되어 있는데 이 노래는 이사야 65장 8절에 인용된 ‘복이 담뿍 들었다. 터뜨리지 말아라’(공동번역)로 시작되는 히브리인들이 잘 아는 세속 노래로서 포도를 따면서 부르는 노래를 말하는 것이며, 시편 56편의 표제 ‘요낫 엘렘 르호김’(먼 느티나무 비둘기)은 시편 55편 6-7의 ‘비둘기처럼 날개라도 있다면 안식처를 찾아 날아가련만’(공동번역) 이라는 세속노래를 말한다고 한다. 이러한 민요곡조로 생각되는 것이 ‘새벽 암사슴’(아앨렛샤할, 시22), ‘백합’(시 45, 69), ‘수산 에돗’(시 60, 80) 등등이다.
위의 주장들을 종합할 때에, 시편이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앙고백을 히브리적 가락에 실어 하느님께 드린 찬송가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찬송가에는 히브리적 영성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찬송가’는 한국인들의 신앙고백을 한국적인 가락에 실어 하느님께 드리는 찬송가인 것이다. 그리고 ‘한국찬송가’는 한국인의 영성을 담고 있는 찬송가인 것이다.
2. 시편에 나타난 영성과 한국찬송가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의 고난과 아픔을 시가 갖는 독특한 힘으로 이겨내고 버티어 왔다. 시는 그들을 살아남게 하고 꺼지지 않게 하는 힘의 원동력이었다. 이러한 시들은 거의 대부분 바벨론 포로 이전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이미 불리어졌던 시들이었다. 그런데 바벨론 포로 이후, 성전이 재건되고 난 후에 지금의 시편의 형태로 수집, 편집한 것이다. 유배지에서 돌아온 이후 제2성전이 재건되고 이스라엘이 다시 제사를 드리기 시작했을 때, 오랜 세월 민중의 넋과 한이 담긴 노래들이 모아져 오늘의 시편을 이루고, 성전 찬송가집으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이은재는 이러한 시편 찬송가는 히브리인들의 삶의 자리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하였다. 시편 찬송가에는 ‘한(恨)’이라는 그들의 영성이 담겨 있었고, 히브리인들은 그들의 한(恨)을 하느님께 시로 찬송하였다. 노희원은 이스라엘의 한(恨)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실 ‘한’의 개념은 인간의 영혼의 문제를 이해하지 않으면 제대로 이해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한은 우리 생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으며 그야말로 ‘영의 탄식’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에게 생명 사상과 나란히 흐르는 중심사상이 있다면 그것은 골수에 맺힌 한이라고 할 수 있다. (중략) 이스라엘의 ‘한’이 어디서 생겨났느냐 하는 것도 이스라엘이 주변의 열강으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중략) 그러다 보니 어려운 현실을 견디기 위해 영성이 심화되지 않았나 싶다.
히브리인들은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그들의 신앙고백을 그들의 가락에 따라 하느님께 노래하였다. 그 때, 찬송은 그들에게 힘을 주었다. 찬송은 영적인 힘을 불러 일으켰고, 찬송은 그들에게 믿음을 주었던 것이다. 그 한 예가 시편 23편이다.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길이요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시편 23:1-4) - 공동번역
그들은 바벨론 포로 이후, 페르시아의 지배가 계속되는 노예의 자리에서 ‘주님이 우리의 목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 부족함이 없다’고, ‘주님이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신다.’고, ‘주님이 우리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고 찬송을 하였다. 이 찬송은 그들에게 영적인 힘을 불러 일으켰고, 그래서 그들은 노예의 자리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희망하였다. 그래서 왕대일은 시편의 노래는 힘을 지니고 있고, 생명을 불러일으키며, 살아있는 영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찬양시는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긍정을 고백하고 확인하는 노래이다. 삶의 모든 순간, 모든 영역, 모든 조건에서 하느님의 사랑, 진실, 정의와 용서를 찬미하는 노래이다. 이스라엘의 찬양은 찬양하는 자로 하여금 자기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며, 변혁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 찬양에서 이스라엘의 시인들은 삶을 유지시키는 ‘생명’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찬양은 신앙인의 살아있는 영성인 것이다.
히브리인들은 히브리적 영성이 담겨 있는 신앙고백을 히브리적 영성이 담겨 있는 히브리적 가락에 따라 불렀다. 그 때, 시편 찬송가는 히브리인들의 영적인 힘과 생명을 불러 일으켰다. 따라서 ‘한국찬송가’는 한국인의 영성이 담겨 있는 신앙고백을 한국인의 영성이 담겨 있는 한국적 가락에 따라 부르는 찬송가인 것이다. 그리고 ‘한국찬송가’는 한국인의 영성을 불러일으키는 찬송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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