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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아온 생각/행복

[스크랩] 진짜는 행복보다 거룩을 열망한다

elimcy 2012. 5. 3. 22:38

진짜는 행복보다 거룩을 열망한다

 


A. W. 토저 지음 / 이 용복 옮김

참된 영성의 척도

영성(靈性)의 개념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마다 서로 다르다. 어떤 모임에서는 신앙에 대해서 끊임없이 큰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으로 간주된다. 또 어떤 모임에서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열심을 내며 활기 찬 모습이 영성의 특징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또 어떤 모임에서는 가장 먼저, 가장 길게, 가장 큰 소리로 기도하는 사람이 가장 영적인 사람이라는 명성을 얻는다.

뜨거운 간증, 빈번한 기도, 큰 찬양이 영성과 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것들 자체는 영성도 아니고 영성의 증거도 아니다.

참된 영성의 척도는 ‘우리에게서 주로 나타나는 갈망들이 무엇이냐? 라는 것이다. 이런 갈망들은 언제나 우리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것들로서, 우리의 삶에 동기를 부여하고 우리의 삶을 통제할 만큼 강력하다. 이런 갈망들 몇 가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다음에 언급되는 순서는 중요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첫째. 거룩해지기를 바라는 갈망

자신들이 남들보다 더 거룩하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행복에 대한 갈망’은 실상 그들이 거룩하지 않다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 정말로 영적인 사람은, 기쁨 일이 생겨도 교만해지지 않을 정도록 성숙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쁨을 부어주신다는 것을 잘 안다. 존 웨슬리는 초기 감리교 단체들 중 한 단체의 구성원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사랑 안에서 온전해진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떻게 하면 거룩해질 수 있는지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종교를 즐기기 위해 교회에 오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

이 세상에서 스스로 고난과 수치를 당하면서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한 후, 속으로 “제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는 일종의 영적 ‘반사작용’에 의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 그는 모든 선택의 순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선택한다. 그는 선택할 때에 자기 자신과 논쟁을 벌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는 그의 마음은 확고하기 때문이다. 질식 상태에 놓인 사람이 공기를 갈망하듯이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한다.

셋째, 스스로 십자가를 지려는 마음

영적인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기를 원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역경과 환난을 받아들일 때 한숨을 쉬면서 그것을 ‘십자가’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들은 역경과 환난이 의인과 악인에게 모두 찾아온다는 것을 잊고 있다. ‘십자가’라는 것은 우리가 굳이 당하지 않아도 되는 환난을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기 때문에 당하는 것이다. 이 십자가는 우리에게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결과를 충분히 예상하면서도 자발적으로 지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순종하기를 선택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십자가를 선택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고, 그리스도의 주권적 지배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사람이 바로 영적인 사람이다.

넷째, 하나님의 관점에서 판단하려는 갈망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이 영성이 깊은 그리스도인이다.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저울로 달아보고 하나님께서 평가하시듯이 그것들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성령 충만한 삶의 표시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들을 보시되, 그것들을 꿰뚫어 보신다. 즉, 하나님은 단지 표면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꿰뚫어 보신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본질을 보지 못하고 겉모습만 보기 때문에 겉모습에 따라 우쭐하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한다. 그러한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보시듯이 깊이 있게 꿰뚫어보고, 그분이 판단하시듯이 판단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보기에 그의 명예가 손상되고 그의 무지(無知)가 드러나서 곤란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기를 고집한다.

다섯째, 의로운 삶에 대한 갈망

영적인 사람의 또 다른 특징은 잘못 사느니 차라리 옳게 죽는 것을 택하는 것이다.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의 확실한 특징은 생에 초연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며 몸에 집착하는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생각하면 두려움에 떤다. 그러나 이런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계속적으로 성령 안에서 살아가면 점점 이 땅에서 얼마동안 더 살 수 있는지에 집착하지 않고, 오히려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가치있게 사는 것인지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더 연장하려고 신앙적 가치를 희생시키고 타협의 대상으로 삼는 불신앙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가 가장 원하는 것은 의로운 삶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여생(餘生)의 길이를 결정하시도록 맡기고 평안을 누린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죽을 수 있으며, 또한 자신이 옳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바로 이런 지식이 그의 사고(思考)와 행동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 준다.

여섯째, 기꺼이 희생하려는 마음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또 다른 특징은 다른 사람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는 것이다. 그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고, 자신은 주목받지 못해도 그들이 향상되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 그의 마음에는 시기심이 없다. 그는 자기 형제가 영예를 얻을 때 기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며, 그 뜻이 그의 지상 천국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때 기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보다 높아지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그는 자신의 낮아짐을 얼마든지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일곱째, 시간을 초월하는 마음

영적인 사람은 ‘시간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영원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습관이 있다. 신앙에 의해서 세상의 풍조와 시간의 유한성을 초월한 그는 마치 이미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나라에 도달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느끼는 법을 배운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구성원들과 무수한 천사의 무리에 이미 합류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느끼면서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 이런 사람은 유명한 사람보다는 유용한 사람이 되고,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기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이런 모든 것들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활동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누구도 자기 혼자의 힘으로 신령한 사람이 될 수 없다. 자유로우신 성령님만이 사람을 신령하게 만들 수 있다.

무료 교환

“오직 주를 우러러 바라는 자들은 그들의 힘을 새롭게 하리니”(But they that wait upon the LORD shall renew their strength)(사 40:31)

몇 년 전에 나는 한 위대한 설교자가 하는 말을 들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사야서 40장 31절에서 ‘새롭게 하다(renew)'라는 말은 사실 ’교환하다(exchange)'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 나오는 ‘그의 힘을 새롭게 할 것이다’를 ‘그의 힘을 교환할 것이다’로 바꾸어서 읽어야 한다.”

이상하게도 지금 나는 그가 설교를 어떻게 전개했는지 또는 이 본문을 어떻게 적용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최근 나는 그가 아주 중요한 진리를 발견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진리는,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많은 부분이 나쁜 것을 좀 더 좋은 것으로 ‘교환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실로 복되고 기쁜 거래가 아닐 수 없다!

기독교 교리의 뿌리는 ‘대속(代贖)의 교리’이다. 대속은 죄인들의 죄가 구주에게 전가된 것을 의미한다. 나는 비기독교인들이 이 교리를 얼마나 맹렬히 공경하는지를 잘 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지혜로운 자들은 소박한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발견하는 보물을 교만 때문에 발견하지 못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를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이 진리는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눈을 감아버리는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놓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의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간단한 것이다. 그 누구도 이 진리를 믿도록 강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진리는 진리이다.

이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이런 시작 이후에 거의 모든 것은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교환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죄(罪)가 의(義)로 바뀐(교환된) 다음에는 ‘진노’가 ‘받아들임’으로 교환된다. 오늘은 하나님의 진노가 ‘죄를 지으면서 회개하지 않는 사람’ 위에 머물지만, 내일은 하나님의 미소가 그 사람 위에 머물 수 있다. 오늘과 내일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야 이것이 가능하겠는가? 그가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정죄의 자리’를 ‘아버지의 집’으로 교환하면 된다. 그는 본래 하나님에 의해서 거부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지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어떤 수단이나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에 의해서 된다.

그 다음에 일어나는 교환은 죽음과 생명의 교환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을 위해서 죽으신 것은 그들을 살리기 위함이었다. 이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 다소 난해한 바울의 고백을 인용한다면 바울도 기뻐할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있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라.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갈 2:20)

이것은 참으로 신비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믿지 못할 것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길과 인간의 길이 얼마나 서로 다른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인간은 구두를 더 좋게 하려고 구둣방으로 가서 그것을 수선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품종개량을 통해 좋은 소를 만들어내고 작업 공정의 합리화를 통해 자동차와 비행기의 품질을 향상시키고, 다이어트와 비타민과 수술을 통해 건강을 증진시키고, 접목법(?木法)을 통해 식물을 개량하고, 교육을 통해 인간을 성숙하게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이런 방법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분은 기존의 것을 꿰매어서 좀 더 좋은 것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인간을 새 사람으로 만듦으로써 인간을 변화시키신다. 그분은 새 생명을 주시고 옛 사람을 파괴하는 작업에 착수하신다.

앞서 이사야의 본문에서 암시되었듯이, 이 단계에서 그리스도인은 약한 것을 강한 것으로 교환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을 강하게 만드신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없다. 그러나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들의 연약함에 비례하여 그만큼 강하게 된다.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는 바울의 말은 이 진리를 잘 말해준다. 바울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스스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본을 보여준 것이다.

사실, 가장 강한 상태에 있는 가장 순수한 성도조차 회심하기 전과 마찬가지로 약하다. 회심을 통해서 그에게 일어난 변화는 단지 미미한 인간의 자원이 하닌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으로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그는 약한 것을 강한 것으로 교환했다. 물론 그 교환 후에도 그 ‘강함’은 그의 것이 아니다. 그 ‘강함’은 그가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그에게 흘러들어온 것일 뿐이다.

성 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중대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성화(聖化)의 문제이다. 성화의 문제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갖기를 원하는 사람이 어떻게 해야 최고의 순수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느냐?”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를 제기하고 그 해결 방법을 모범적으로 보여준 것이 사도 바울이 쓴 로마서 7장과 8장이다. “오 나는 가련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는 문제 제기에 대한 답은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이다(롬 8:2).

인간이 도덕적 삶을 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면 좀 더 높은 외적(外的) 도덕성의 단계로 올라설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교도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나 천한 노예 에픽테두스(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로서 니코폴리스에서 활약했다 - 역자 주)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부끄러워할 만큼 높은 수준의 도덕적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성결을 알지 못했다. 그리스도인은 그 무엇보다도 성결을 갈망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힘으로 성결에 도달할 수 없다.

A. B. 심슨(simpson)은 성결하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체험을 통해 깨달은 후, 성경에서 참 성결의 방법을 발견했다. 자신의 설교의 결론 부분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작곡한 찬송가에서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저는 주님을 저의 성결로 받아들입니다.
주님은 제 영혼을 위한 흠 없는 천상(天上)의 옷이십니다.
저는 주님을 저의 의(義)로 받아들입니다.
저는 주님이 제 성결의 문제를 떠맡으신 것을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성결하게 되려는 노력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성결을 이루시도록 의지하면 된다. 틀림없이 그분이 떠맡으실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환해야 할 것들은 많이 있다. 우리의 무지를 그분의 지식으로, 우리의 어리석음을 그분의 지혜로, 우리의 단점을 그분의 장점으로, 우리의 슬픈 죽음을 그분의 복된 영생으로 교환해야 한다. 그리하여 결국 우리는 ‘보지 않고 믿는 신앙’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고 믿는 신앙’으로 교환하게 될 것이다.

- A. W. 토저 지음『나는 진짜인가, 가짜인가?』(이용복 옮김/규장)에서 발췌 -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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