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 감사 그리고 감사...
[스크랩] 다시 생각하는 도산 안창호의 리더쉽 본문
시대가 낳은 , 시대에 앞선 독립운동
도산 안창호의 리더쉽은 훌륭한 멘토
일찌기 민족의 자존심을 일깨워 준 독립운동가. 미국 LA 리버사이드시에는 세계적인 민족지도자 간디,
루터킹 목사와 함께 한국인 안창호선생의 동상이 건립되어 추앙받을 만큼 그의 영도력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네거리에 있는 도산공원을 찾았다. 그곳에서 자라라는 어린이,
청소년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한국의 위인열전 도산 안창호선생의 흔적을 따라 가 보았다.
<1993년, 국민들에게 인간과 국가와 민족이 무엇인가를 사람마다 스스로 삶의 중심과 길을 잡아가는 신교육의
바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청소년들에게 현장 학습장으로 널리 활용하겠다는 취지에서 건립된 도산 안창호기념관
근방 강남구 청담동에서 논현동에 이르는 도로이름은 그의 호를 따서 도산대로로 명명하였다.>
<도산선생의 동상은 2003년에 새로 세워졌댜. 이 동상을 가까이하면서 도산정신을 계승하려고 다짐했다. 한줄기 소나기가 내린 후 갠 날씨라선지 무성한 나뭇가지와 가로수처럼 늘어선 무궁화가 반기고 있다. 국민누구나가 다 아는 그런 인물을 새삼스레 물어 취재하겠다는 것이 성인 기자로서 겸연쩍고, 쑥스러운 일만 같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독립역사의 고전 위인. 도산 안창호를 통해 내가 주목해야할 곳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다시 생각하는 그의 리더쉽, 탄복할 만한 그의 영도력을, 애국지사로서의 도산, 교육자로서의
도산을 쉰이 넘은 어른 나이에 천천히 곰삭여 보는 일도 가슴 설레이는 일이었다.
민족의 선각자 도산 안창호( 1878-1938).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이며, 민족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심정과 자세를 가져야 하며,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고 행동해야 할 지 몸소 본보기로 가르쳐 준 위대한 이가 바로 도산 안창호였다.
그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깊은 감동을 느꼈던 것도 도산 안창호선생이야말로 오늘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진정으로 필요로하는 훌륭한 멘토가 될 수 있겠다는 그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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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LA 리버사이드 오렌지 농장에서 오렌지를 수확하던 모습. "오렌지 하나를 따더라도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다" 역설했다. |
도산 안창호의 초상화로 가장 잘 알려진 사진. 이 사진은 대한임시정부 내부총장 시절 찍은 사진이다. 뛰어난 통찰력으로 내부살림을 꾸렸다. |
그시대에 도산 안창호는 어떤 키워드로 세상을 바꾸고자 했을까?
그 당시 그는 어떤 세상을 경험하고 싶어 했을까?
그가 태어났던 1878년은 고종 15년, 서서히 주권을 잃을 암흑의 나라로 들어가는 경술국치의 길목.
한학을 공부해 왔던 도산은 청.일전쟁의 휴유증을 몸소 경험한다. 강한 나라와 맞설 힘이 없는 나라인 것에
뼈아프게 느꼈던 청년기. 그는 평생 나라와 겨레를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 왜 주변의 나라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싸움을 할까? 참으로 통탄할 이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맨 먼저 그가 참여한 것은 독립협회 활동이다.
서재필박사가 주축이 된 협회 활동을 통해 자주적으로 나라살림을 바로 잡으려던 민중대회인 만민공동회,
이어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항일 비밀결사단체 신민회 등등 기획력, 조직력으로 계레의 부흥운동을 또하나 독립운동의 길이라고 굳게 믿고 매진했다. 그렇다고 도산 선생이 행동(무장투쟁이나 전쟁 등) 에 대해 다소 소극적이었다는 독립운동가는 아니었다. 도산이 이야기하는 기획이나 조직력은 군대를 설립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1인당 얼마만큼의 자금이 필요한데 최소한 이정도는 준비를 하고 행동(전쟁 등)을 하자는 의미의 내용들을 분명하게 지침서로 남겨 놓았다.
도산은 이미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암울했던 시기에 미주 여러지역에 분산되어 있는 한인단체들을 모아서 만든 대한인국민회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지금도 뿌리깊게 활동하고 있는 흥사단을 창립해 민족운동을 담당할 지도자를 키우고, 국민계몽에 앞장 섰다. 북미는 물론 하와이, 만주, 시베리아 등 그가 머문 곳에는 조직이 결성되고 소식지 신문이 발행되고, 널리 홍보에도 주력했다.
이런 고도의 전략으로 흩어진 해외 한인을 계몽하고, 자주적 국가독립을 외쳤던 도산의 리더쉽은 탁월했다.
<전시자료 중 가장 눈에 띈것은 그의 60평생 대여섯장의 초상화사진과 미국 리버사이드농장에서 노동자와 함께
일하는 모습, 2남 2녀와 찍은 단란한 가족사진. 그리고 주도면밀했던 독립운동 구상도 자료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1913년 도산이 흥산단을 설립하면서 구상한 독립운동의 단계별 구상도에는 각 단계별로 기초, 진행준비, 진행결과
등등 준비되어야할 사항들을 빼곡하게 표시해 두었다. 이 한 장의 유물에서 도산이 얼마나 주도면밀한 위대한
지도자 인가를 다시한번 보여준다. >
<말년에 도산은 3.1운동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이 되어 임시정부가 하는 일을 널리 알렸다. 그러다
1932년 매헌 윤봉길 의거로 상하이에서 체포되었고, 대전형무소 감옥 생활 끝에 얻은 지병으로 향년 60세로 숨을
거두었다. 현재 살아있는 도산의 유족은 모두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장남 필립은 영화배우로서 성공했고, 장녀
수산은 미해군 최초의 여성포격술 장교로, 미국 해군특수부대 대위로 또 비밀정보 분석가로 활동했다. 뛰어난
기획력과 조직력으로 무장된 독립유공자 자녀답게 자랑스런 대한의 딸이다. 부인 이혜련여사는 현재 도산공원
안에서 남편 도산 안창호선생 옆에 잠들었다.>
<도산공원내 도산기념관 전시실 입구 >
도산이 60평생 꿈꾸었던 독립운동.
그는 십대에 고향을 떠나 서울에 와서 선교사가 세운 구세학당에서 영어를 배우고, 신식학문을 접했다.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고, 공부시켜주는 구세학당에서의 신식교육은 어느새 그의 이상을 바다건너 세계를
향해 돗을 달아 주었다. 그 시대에 추앙받았던 도산은 일생을 살면서 만나보고 싶고, 함께 만들어가고 싶은
세상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진정한 로망이었을까? 오늘을 살면서 애국에 대한 열정을 도산안창호선생을
통해 얻고자하는 희망나눔, 그의 진정성있는 리더쉽이 더욱 간절하게 다가온다.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했던
독립유공자 도산 안창호 선생.
그의 전시실 입구 정가운데서 발견한 비장한 어록은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기자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감히 이렇게 바꿔 읊조려 본다.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 해 왔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도산의 말씀>
“청춘예찬기자단은 하루 해가 시작되면 병무청 블로그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 해 왔다.
이것은 제4기 블로그 기자단 활동이 끝나는 올 11월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청춘예찬기자의 다짐>
제4기 청춘예찬 블로그 기자님들이여~. 곧 9월이 다가옵니다.
우리 또한 병무홍보요원으로서의 막중한 사명감, 수준있는 블로그의 유공자가 되어 보리라는 열정은
아직 식지 않았겠지요? 페어 플레이 합시다. 그럽시다.
(취재: 김영숙어머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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