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 감사 그리고 감사...
장애인 김해영 본문
134cm 의 거인 :불가능을 가능케 한 사람
아프리카 보스니아에서 청소년들에게 기술을 14년간 기르친 김해영씨
척추장애→ 14살 식모살이→ 세계장애인기능 금메달→
14년 아프리카 봉사→ 美컬럼비아대 석사134㎝의 巨人
첫아이가 딸이라 화가 난 아버지는 만취해 아이를
방바닥에 내던졌고 척추를 다친 갓난아기의 키는 더디게
자랐으며 공부는 초등학교가 끝이었다.
아버지는 자살, 정신질환을 앓는 엄마 대신 동생 넷을
키우기 위해 열네 살 때 남의 집 식모살이를 시작했다.
세상은 내게 좌절을 권했지만 나는 희망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살기 위해 공부했고 직업훈련원에 들어갔다.
배움에 목마른 소녀는 뭐든 악착같이 배웠다.
편물 기술로 전국기능대회를 휩쓸었다.
1985년에는 세계장애인기능경기대회에서 기계편물
부문 1위를 차지했다.
아프리카 남부의 작은 나라 보츠와나에 스물여섯 살 때 갔다.
어린 시절의 자신처럼 아무 희망도 없는 아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쳐주며 꿈꾸게 하고 싶었다.
14년 동안 보츠와나 직업학교에 헌신한 그녀는, 미국 나약
(Nyack)대학을 거쳐 2009년 미국 컬럼비아대학 국제사회복지
대학원에 입학한다.
주인집 창문 너머 교복 입고 지나가는 아이들만 보면 눈물이
솟았던 '열네 살 식모'는 이제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국제사회복지사가 됐다.
5일 서울 한남직업전문학교(현 중부기술교육원)에서
김해영을 만났다.
그녀가 처음 편물기술을 배운 학교다.
그녀가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청춘아, 가슴 뛰는 일을 찾아라' 스승인 컬럼비아대학교
모이라 커튼 교수의 권유로 그간의 살아온 이야기를 책으로
엮었다고 했다.
커튼 교수는 추천사에 이렇게 썼다.
'그녀는 장애를 부정적인 방식으로 정의하지 않고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의미 있는 인생으로
창조해냈다.'
134㎝에서 성장을 멈춘 그녀는 굽 높이가 10㎝가량 되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녀가 다닌 한남직업전문학교
"오른쪽 다리가 왼쪽보다 1인치 짧아서 늘 기울어진 채로
서 있다.
척추가 왼쪽으로 휘어져 있어 허리가 아프고, 20~30m
걸어가려면 서너 번 쉬어야 한다. 앉아 있는 게 힘들다.
통증을 줄이려고 허리복대를 13년 동안 감고 다녔다.
공부는 엎드려서 하거나 누워서 한다."을 냈다.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쓸모없는 딸로 태어나 시작된 시련이었다.
엄마가 정신질환으로 운신을 못하니 아홉 살 때부터 내가
집안 살림을 했다.
고물상을 하시던 아버지는 당신이 짊어진 삶의
무게가 너무 힘들어 스스로 세상을 버리셨다.
가난, 고생 다 견딜 수 있었지만 엄마가 나를 미워하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집이 불행해진 게 다 내 탓이라고 하시면서 날 낳은
친엄마가 맞나 의심할 정도로 때리고 구박했다.
세계 그늘진 곳을 누비며 국제사회복지사 ' 김해영'씨
오늘까지만 살고 죽자 배움에 대한 욕심이 상당했다.
“중학교에 입학한 친구가 영어책이라며 보여주는데
마음이 울컥했다.
‘I am a girl. You are a boy’라고 읽으라고 했다.
두 번째 월급 받은 날 서점에 가서
‘국어완전정복’과 ‘영어완전정복’을 샀다.
마침 내가 일하던 집이 한의원이어서 곳곳에 한자가 적혀
있었다.
무슨 뜻인지 궁금했는데 주인 할머니가 천자문 책을 주셨고
그때 시작한 한자공부가 사서오경까지 이어졌다.
책을 읽을 때 나는 정말 행복했다. 책 속의 세상은 바르고
아름다웠다.
‘잘못한 것을 알고도 고치지 않는 것이 더 큰 잘못’이란
글귀가 좋았다.
아버지와 엄마에 대한 미움과 증오, 슬픔의 감정들도 책을
읽으면서 치유했다.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바르게 사는 것인지
책이 내게 가르쳐주었다.”
식모를 그만두고 직업훈련원으로 갔다.
“반상회보에 무료 직업학교 훈련생 모집이라는 광고를 보았다.
기술을 배우면 식모 월급 3만원보다는 많이 벌었다.
양재를 배우고 싶었는데 그건 경쟁이 치열하다고 해서
기계편물을 지망해 6개월간 배웠다.”
2010년 5월 미국 컬럼비아 대학원 졸업식 기념사진
기술을 배우면서 검정고시도 치렀다.
“그때는 중졸, 고졸이라는 학력이 무척 갖고 싶었다.
낮에는 기술 배우고 밤에는 야간학원에서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책상이 높으니 의자에 책을 몇 권 깔고 앉아 공부했는데,
앉은 자세로 있으면 허리에 통증이 심해져 집에 돌아가
두 시간씩 울었다. 그래도 좋았다.
무언가를 새로 배울 땐 내가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육체적 고통도 잊을 수 있었다.”
국내외 기능대회를 섭렵했다.
1983년 전국장애인기능대회,
1984년 전국기능대회 편물 분야에서 금메달을 땄고,
1985년 콜롬비아에서 열린 세계장애인기능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손으로 뭔가를 하는 일에서는 뒤처진 적이 없는 것 같다.
허리와 다리가 약한 반면 손의 힘이 상대적으로 발달했다.
뭘 새로 배우는 걸 겁내지 않았다.
음식을 만들어도 빠르고 정확하게 한다. 오래 서 있으면
허리가 아프니까 뭐든 빨리 빨리다.”
책에는 직업훈련원 다니던 시절 신앙을 갖게 됐다.
세상에 나밖에 믿을 사람이 없었는데, 학교에 와보니 나를
위해 걱정해주고 내 앞날을 염려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나님을 믿어서가 아니고, 나에게 관심을 가져준 그들이
고마워 교회를 따라다녔다
1990년 아프리카 보츠와나로 떠난다.
한 선교단체의 회보에 실린 광고를 보니 보츠와나
직업학교에서 편물교사 단기 자원봉사자를 모집하고 있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기계편물의 장인으로 마음만 먹으면 월급
많이 주는 직장에 취직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모든 것을
버리고 아프리카로 갔다.
“그곳에는 비참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는 아이들이 있었다.
약간의 기회와 교육과 격려가 있다면 얼마든지 훌륭하게
성장할 청소년들이 있었어요.”
우연히 거창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 쓰신 글을 읽게 됐다.
‘직업선택 십계명’ - ‘아무도 가지 않는 쪽으로 가라’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는
구절이 가슴을 파고들더라.
황무지 보츠와나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칼라하리 사막의 ‘굿 호프(Good Hope)’라는 곳이었다.
“우리나라 50~60년대 풍경이었다. 전기도, 전화도 없고
도로포장도 안 된 오지였다.
사막 한복판엔 흰색의 일자건물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오전에는 수업하고 오후에는 교사 학생 모두 삽과 곡괭이를
들고 일을 했다.”
아프리카 보츠니아의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
“처음엔 먹을 게 없어서 배고플 때 제일 힘들었지만
나는 굿 호프에서 행복했다.
‘You are so beautiful’이란 말을 거기서 처음 들었다.
키 작고 볼품없는 나를 그들은 예쁘게 봐주고 오히려
도와주었다.
세면장, 싱크대 밑, 교실 칠판 아래에다 아이들은 나만을
위한 발판을 만들어주었다.
기적적으로 허리의 통증이 줄어들었다.”
많은 이가 선교를 명분으로 들어오지만 원주민들에 대한
고압적인 자세, 가르치려는 태도로 수많은 오해와 갈등을
낳는다.
나는 학교의 주인공은 원주민 학생들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림자처럼 그들 뒤에 서 있었다.
4년 만에 직업학교가 폐교되어 “떠나려고 했다.
마지막으로 짐을 싸고 있는데 여학생 다섯 명이
찾아와 계속 공부하고 싶으니 계속 가르쳐달라고 매달렸다.
꿈을 심어준 사람들은 떠났지만 뿌려진 꿈의 씨앗은 자라고
있다는 걸 보고 가슴이 뛰었다.
나를 선생이라고 믿고 찾아와서 가르쳐달라고 하는 아이들이
있으니 나는 이곳에서 계속해서 살아야 할 의미가 있었다.
다시 운영진과 이사진을 꾸렸고 내가 교장을 맡았다.
10년간 교장으로 일하는 동안 학생 15명이 80명으로
늘었다.”
의식주가 열악한 것은 물론, 권총강도가 성행할 만큼
위험한 곳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온갖 험한 일을 겪으며
살아온 게 힘이 돼주었다.
사막이 왜 좋은가 하면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죽음 같은 고독, 텅 빈 땅에서 얻는 영성이 있다.
도덕, 신앙을 떠나 생명 그대로를 경외하고 존중하는 법을
나는 그 거대한 칼라하리 사막에서 배웠다.
비를 피할 지붕만 있으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살아있음만으로 나는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을
사막에서 깨달았다.
내가 없어도 학교가 저절로 굴러갈 만큼 자리를 잡았고,
나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어서 2004년
보츠와나를 떠나 미국으로 갔다.
서른아홉 살에 뉴욕에 있는 나약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다.
“뉴욕선교부에 계시던 목사님이 추천해주셔서 입학할 수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니, 꿈만 같았다. 엄마의 건강도 좋아졌고
동생들도 일가를 이뤄 살고 있으니 이제 나 자신만 책임지면
되었다.
무일푼이었지만 맨해튼 한가운데 서 있어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아프리카 그 거대한 사막에서 살아나온 내가 무서울
게 없었다.”
제도권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내가 “기술 연마라는 집중과
반복으로 공부를 했다.
결석 한 번 하지 않았고 4년 내내 4.0만점에 3.8점을 유지했다.
그러나 나의 가장 큰 걱정은 학비였다.
첫 학기 학비만 4950달러였다. 월급 없이 14년을 보츠와나에서
살았으니 내게 돈이 있을 리 없었다.
내 사정을 전해들은 교포들이 장학금을 대주시고, 휴스턴에 있는
한인교회 청년들은 500불씩 모아 생활비로 보내주셨다.
미국에서 공부한 7년 동안 등록금이 없어 중도 포기할 위기가
많았지만 그때마다 도움의 손길이 나타났다.
내 공부는 나를 위한 공부가 아니다.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들,
청소년들에게 나를 선물로 보내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영어에 익숙해진 건 보츠와나에 와서 아이들을 가르치려면
맨땅에 헤딩하기로 영어를 배워야 했다.
그런데 영어보다 중요한 게 만국공통어다. 생각해보니 나는
그 공통어에 능했던 것 같다. 표정과 손짓, 눈빛이다.
거기에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진심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명문 컬럼비아 대학원에 진학했다.
다들 불가능하다며 말렸다. 나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합격해서
믿어지지 않았다.
동양에서 온 장애인 여성이 아프리카에서 14년 살다가 온 것이
컬럼비아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해준 것 같아 감사할 뿐이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부탄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르면 올가을부터 부탄 여성들에게 편물기술을 교육하게 된다.
한국에 오면 소년 범죄에 연루된 아이들에게 상담해주고
검정고시 특강을 해준다.
아프리카의 이야기에 아이들은 귀를 쫑긋 세워 듣는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도 그걸 희망적으로 해석하면
살아나올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려고 노력한다.
사람들은 나의 작은 키를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생각하지만
작은 키가 내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아이들은 제 키와 비슷한 나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저희를 내려다보거나 위협하지 않으니까. 부탄이든, 아프리카든,
한국이든 내가 필요한 곳이면 언제든 달려갈 것이다.
당신을 움직이는 초인적인 힘은 무엇일까.
행복한 것은 그냥 지나가지 만, 아픔과 상처는 지나가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반짝반짝 빛을 낸다.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그 상처와 아픔의 힘으로 내가 계속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프리카에서 생사를 넘나든 경험은 다시 미국 유학을 가능하게
한 다이아몬드가 되어 주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곧은 등, 긴 다리를 갖고 싶겠지?
“물론이다. 내가 견뎌낼 만한 고통이 있다는 건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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