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 감사 그리고 감사...
[스크랩] 죄의 본성을 죽이는 방법 본문
죄의 본성을 죽이는 방법
그리스도인이 거듭난다고 할지라도 타락한 육체의 본성은 사라지거나 제거되지 않는데, 어떻게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가?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참된 거듭남을 경험할 때에 육체의 죗된 본성이 사라지거나 제거된다고 말하는 대신에, “죽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죄의 본성이 죽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이 중요한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과 독수리 같은 본성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쟁투를 이해해야만 한다. 이 전쟁은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오히려 자신이 죽임을 당하게 되는 매우 치열한 전쟁인데, 바울은 이 전쟁에서 독수리를 죽이고 승리하는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로마서 6:6. “옛 사람”은 죗된 본성을 말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그것을 독수리라고 표현하기로 하겠다. 옛 사람(죗된 본성) 즉, 독수리를 죽이기 위해서는 그것을 품고 있는 내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는 경험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죽는 것이 필요합니까?” 또는 “꼭 죽어야 합니까?” 라는 질문을 던지며 죽기를 거절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죽기보다는 자기 안에 있는 선한 어떤 것을 계발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악하고 이기적인 존재이므로,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악을 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 라는 결론을 내리면서, 좀더 나은 방향으로 향상시켜 나가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자아의 죽음과 선의 계발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창조와 진화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와 같다. 사도 바울은 자아의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재창조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 안에 있는 어떤 것을 선한 것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진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어떤 것이 하늘가는 길을 걷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참 경험일까?
독수리를 알아야 독수리를 잡는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마태복음 15:18~20. 겉으로 나타나는 열매의 출처는 마음이다.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계시면 자연스럽게 성령의 열매가 맺히지만, 사납고 비열하며 이기적인 독수리 같은 본성이 살아서 우리를 지배하면, 독수리와 같은 말과 생각과 행동을 하면서 살게 된다. 독수리를 죽이기 위해서는 먼저 독수리를 잡아야 하는데, 독수리의 본성을 잘 이해해야만 그것을 잡을 수 있다. 독수리를 잡기 위해서는 먼저 독수리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독수리가 죽은 시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독수리는 참새나 비둘기 같으면 전혀 관심도 갖지 않은채 지나쳐 버릴 죽은 송장에게 침을 흘리며 달려든다. 왜 그럴까? 왜냐하면 그는 독수리이기 때문이다. 독수리는 바로 그러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동물이다. 그는 신선한 과일이나 야채나 곡식보다는 썩어서 냄새가 나는 죽은 시체를 좋아한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독수리를 잡아서 그것의 태도와 습관을 잘 길들여서 온순한 동물로 변화시키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는 먼저 독수리가 들어갈 만한 커다란 새장을 만들어서 그 속에 독수리를 넣었다. 그리고 먼저 독수리의 식생활 습관을 변화시키려고 날마다 사과, 오렌지, 바나나 등을 주었다. 독수리는 여러 주일 동안 주인이 주는대로 잘 받아 먹다가, 어느날 새장 한 구석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그 구멍을 통해 날라가 버렸다. 독수리는 하늘 높은 곳에 떠있다가, 죽어서 쓰러져 있는 당나귀를 발견하고는 쏜살같이 내려가 작고 빨간 혀를 날름거리면서 맛있게 뜯어 먹었다. 주인은 독수리를 위하여 훨씬 더 선하고 아름다운 생활을 준비해 두었지만, 독수리는 자신의 옛 습관을 결코 바꾸지 않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그가 독수리이기 때문이다.
비둘기가 되어야 비둘기처럼 살 수 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시여,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 독수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독수리 같은 본성의 형편을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동안 비둘기와 함께 먹이통 곁에 앉아 있을 수 있다. 또한 비둘기와 함께 어울려서 주인이 주는 모이를 먹고 놀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흉내낼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인이 우리를 지켜보지 않거나, 누군가가 우리 곁에서 지켜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면, 가차없이 독수리의 근성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어서 주변에 있는 비둘기들에게 날카로운 발톱과 부리를 들이댄다. 바로 그 때, 곁에서 우리를 지키고 있던 천사는 눈물을 흘리며 우리가 다시 독수리로 돌아간 사실에 대해서 하늘 왕께 보고서를 기록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경고하셨던 말씀이다. “네가 진정으로 회개하여 새로 거듭나지 않는다면, 너는 곧 매우 두려운 일을 당하게 될거야. 그러니 너는 깨어서 기도해야 한다. 너는 깨어 있어야 해!” 주님의 당부에 대해서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주님, 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당신을 버리고 갈지라도 저는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위기가 오자, 베드로는 닭이 두번 울 때, 세번이나 부인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주님께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했단 말인가? 아니다. 적어도 베드로는 정직하게 말했다. 그는 정말 주님을 끝까지 따르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 속에 숨어 있는 독수리의 참 모습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는가? 예수께서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아시고 있는 것처럼 정확하게?
우리의 죗되고 이기적인 본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나아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체면과 위선이 좀더 완벽한 가면을 만들어 내는 것일 뿐이다. 독수리는 그가 살아 있는한 언제까지나 독수리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어린 양같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가 어린 양으로 다시 태어나는 방법 밖에는 없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독수리를 길들여서 어린 양 흉내를 잘 낼 수 있게 훈련시키는 그러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한, 우리는 적당한 때가 되면 다시 독수리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독수리인 우리는 어린 양으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거듭남의 경험이 없이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시작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거듭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좀더 완벽하게 위장된 가면과 위선 속에서 이웃과 가족을 속일 뿐 아니라, 결국에는 자신마저 기만하는 깊은 늪에 빠지게 된다.
독수리를 죽이는 방법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거듭날 수 있을까? 유일한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독수리를 죽이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 죽음의 모본을 보여주고 있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것처럼, 우리의 자아도 십자가에 못박혀야만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여 함이니” 라고 말했던 것이다(롬 6:6). 그분의 죽음은 우리 모두가 동참해야 할 죽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죗된 자아 즉, 독수리의 본성은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은 매우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우리 속에 있는 독수리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음으로써 배고픔으로 허덕이게 해야 하며, 외쳐대는 그의 요구를 거절해야 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자아를 죽일 수는 없다.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이 일이 가능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분의 죽음을 바라볼 때, 우리 속에서 그분의 희생을 통하여 이루어진 용서와 구원에 대하여 깊이 감사하는 정신이 샘솟게 되며, 동시에 그분처럼 의롭고 경건하며 거룩한 생활을 살고자 하는 소원이 우리의 마음을 채우게 된다. 우리 속에서 생긴 이러한 전격적인 변화는 하늘의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진 마음의 재창조인데, 이러한 변화를 날마다 경험하는 그리스도인만이 자신 속에서 올라오는 독수리의 요구를 거절하고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다. 독수리의 요구에 대해서 “안돼”라고 대답하는 거절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계속해서 이루어질 때, 드디어 독수리는 점점 세력을 잃고 죽어가게 된다. 전에는 커다란 유혹으로 느껴졌던 시험이 이제는 아무런 유혹거리가 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독수리가 우리를 지배하는 힘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가장 위험한 두가지 오해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시여, 독수리와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쟁투는 평생을 통하여 계속되는 경험이다. 오늘의 승리가 내일의 승리를 약속해 줄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간증하면서, “나는 매일 죽노라” 라고 말했던 것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혼돈하고 있는 한가지 경험이 있는데, 그것은 거듭남에 대한 경험이다. 하나님께 마음을 바치고 진심으로 회개하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마음을 주신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을 한 후일지라도, 때때로 자신 속에서 올라오는 옛 본성으로 인해서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경험이 반복됨에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헌신과 회개를 받지 않으셨다고 오해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실망과 좌절 속에서 방황하다가 참된 그리스도인의 길을 떠나고 만다. 옛 본성의 요구에 굴복하는 죗된 생애를 살다보면, 결국에는 성경의 진리를 자신의 죗된 경험에 맞추어서 철저하게 합리화 시키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일단 한번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정죄하지 않으시며, 한번 구원받으면 그 구원은 그 생애가 어떠하던지 간에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는 위험천만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대개 이러한 결론을 내린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주장을 하게 된다;
1. “십자가에서 율법이 폐하여 졌습니다” :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향하여 율법이 요구하는 죄의 값을 완전하게 치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십자가는 죄를 범해도 좋다는 허가증이 아니라, 죄가 요구하는 댓가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보여줌으로써, 인류에게 죄짓기를 중단하라는 그리스도의 피뭇은 호소이다. 십자가는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의 권위와 그 의미를 완전하게 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던 것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마 5:17.
2. “한번 구원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입니다(Once saved, Always saved)” : 옛 본성의 요구대로 살아가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경험을 성경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합리화시키려고 한다. 그래서 과거에 한번 받은 구원은 어떠한 경우에도 잃어 버릴 수 없으며, 심지어는 구원을 거절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원은 날마다 유지되고 지켜져야 한다. 어제 구원받았다고 할지라도, 오늘 내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를 거절하면, 구원은 더 이상 나의 것이 될 수 없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한번 구원받았으면, 나의 믿음과 생활이 어떻하든지간에 무조건 구원받게 된다” 는 가르침을 믿고 있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하늘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사도 요한의 경고를 무시하지 말라(계 21:17). 구원은 과거에 이루어진 한순간의 결정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한번 결정한 후에도,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계속 성장해 나가는 일이 필요하다. 한번 거듭났다고 할지라도, 옛 본성의 요구를 계속해서 거절하는 선택이 필요하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롬 6:16.
다시 이야기를 계속해 나가자. 그렇다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죄를 지으려는 충동을 느낄 것인가? 그렇다. 왜 그런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 기 때문이다(갈 5:17). 거듭남을 경험한 후일지라도, 육체의 소욕 즉 옛 사람(독수리의 본성)이 우리 속에서 계속 부르짖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과나 당근처럼 유익하고 선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무엇인가 썩고 부패한 것을 원한다. 비록 독수리가 그러한 것들을 강력하게 요구한다고 할지라도, 놀라거나 실망할 필요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유혹과 충동을 느끼는 자체는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유혹에 굴복하여 그것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서 끌려다니기로 선택할 때, 바로 그 순간에 죄는 성립된다. 밖으로부터 다가오는 유혹과 우리 속에서 그 유혹에 굴복하라고 종용하는 독수리의 요구에 대하여, 우리가 굴복하느냐 아니면 거절하고 승리하느냐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관건이다. 그런데 성경은 오직 새롭게 거듭난 자들만이 승리할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마음을 그리스도께 바치고 독수리의 요구를 거절하기로 선택해야만 한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다시 살펴보자. 그리스도인의 마음 속 이 쪽에는 십자가가 있고, 저 쪽에는 마음의 보좌가 있다. 우리가 마음의 보좌에 그리스도를 앉도록 모신다면, 옛 사람 즉 독수리 같은 본성은 십자가에 못박히게 된다. 시험과 유혹이 접근해 왔을 때, 우리가 예수께 대하여 “예”라고 대답한다면, 자신 속에 있는 독수리에 대해서는 “안돼”라고 대답하는 것이 되는데,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매일 경험해야 할 생애이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예”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독수리의 부르짖음에 대해서도 “예”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들은 십자가에는 어떤 것도 못박으려고 하지 않는다. 공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지는 않지만, 독수리 역시 못박아 죽이려고 하지 않는데, 그러한 사람들이야말로 뜨뜻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인들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 속에 독수리와 예수님과 세상을 함께 모시고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의 마음 속 보좌에는 오직 예수님 한분만 모시며, 십자가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독수리 같은 본성을 못박는 사람을 의미한다. 바로 이런 사람만이 승리의 생애를 살 수 있다.
십자가에 못박힌 독수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신을 놓아달라고 소리치고, 협박하는 것일 뿐이다. 못박힌 독수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달라고 요구하며, 자신이 원하는 곳에 가라고 부르짖고, 자신이 범하기 원하는 죄를 범하라고 졸라댄다. 자신의 날개와 발에 박힌 못을 빼달라고 애원하며 절규한다. “나를 풀어 주세요! 잠시 풀어 놨다가 다음 주에 다시 못박아도 되쟎아요!” 못에 박힌 독수리는 항상 논리적으로 우리 자신을 설득하려고 애쓴다. 이러한 논리에 휘말린 그리스도인은 오늘은 독수리를 못박았다가 내일은 풀어주는 생활을 되풀이 하면서, 독수리의 요구에 끌려 다니는 피곤한 신앙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내일이면 또 독수리를 풀어줄텐데” 라는 생각 때문에 독수리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을 중단하게 된다. “어차피 다시 풀어줄 독수리를 구태어 힘들게 못박을 필요가 어디있나?” 라는 논리에 휘말리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독수리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을 중단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기 시작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자아가 죽는다는 말의 의미
이제,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 자로 여길지어다.” 롬 6:11. 여기서 우리는 “여길지어다(consider)” 이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여길지어다” 라는 말에는 “꼭 그러한 것으로 간주하라” 는 뜻이 담겨 있다. 아마 여러분 중의 어떤 분은 이렇게 항의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전에는 죽어야 한다고 말해 놓고서, 이제는 죽지 않았지만 죽은 것으로 여기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다. 아직 살아 있지만, 죽은 것으로 여기라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체는 예수께서 재강림하시는 그 날까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옛 본성이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옛 본성의 손과 발이 십자가에 못박혀 있기 때문에, 그것이 원하는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는 의미에서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지, 그것이 어떠한 것도 요구하지 못하거나 부르짖을 수 없는 상태로 되었기 때문에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수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절제와 극기의 생활을 하고 있지만, 사도 바울이 말한“죽은 것으로 여길지어다” 의 의미를 오해하거나 깊이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열심을 잃어버리고 실망하여 뒤로 후퇴해 가고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영감적인 기록에 깊은 주의를 모아야 할 필요가 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죄를 지으려는 충동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육체의 소욕이 성령을 거스려 싸우기 때문이다. 마음 속에서 성령과 육체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쟁투는 쉼이 없는 투쟁인데, 그리스도의 도우심이 필요되는 곳은 바로 여기이다.” Messages To Young People, 114.
독수리의 요구를 거절하라
우리 속에 항상 독수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자신에 대해서 결코 자부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속에서 냄새를 피우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독수리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나의 진짜 모습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자신의 그런 추한 모습을 보면서 자신에 대해 실망하고, 미워하며, 불신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서 진정으로 선한 어떤 것을 사모하게 되는데, 바로 이 때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리라” 라는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 속에서 들려주시는 비둘기 같은 성령의 음성과 독수리의 요구를 동시에 받아들일 수 없다. 한 음성에 순종하면, 다른 하나는 자동적으로 거절하게 된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두마리의 새가 있다. 하나는 죗된 옛 본성을 상징하는 독수리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역사를 상징하는 비둘기이다. 우리가 비둘기를 사랑하여 비둘기를 기르기로 선택하였다면, 우리는 비둘기에게만 먹이를 주어야 한다. 반면에 독수리는 굶겨야 한다. 우리는 독수리와 비둘기에게 동일한 먹이를 줄 수 없다. 왜냐하면 비둘기는 죽은 시체나 썩은 고기는 전혀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령님과 독수리같은 본성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다. 우리는 하루를 사는 동안에 어떤 먹이를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가 텔레비젼 속에서 튀쳐나오는 각종 썩은 것들을 즐겨 받아 먹을 때, 그리고 각종 책이나 잡지에서 더럽고 추악한 사상들을 즐겨 받아 먹을 때, 독수리는 먹이를 찾은 환희의 소리를 크게 지르며 “바로 이것이 내가 기다리고 원하던 것이야! 좀더 자극적이고, 더러운 것들로 나를 즐겁게 해달라!” 고 외치면서 달려드는데, 이런 경우 우리는 힘없이 독수리의 요구에 굴복하게 된다. 독수리와 비둘기는 우리가 주는 먹이에 비례하여 성장한다. 만일 우리가 독수리가 좋아하는 먹이로 마음과 생각을 가득 채우면, 독수리는 에너지를 얻어서 더욱 활개를 치면서 우리를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끌고 다닐 것이다.
우리는 독수리의 요구를 거절할 때에 매우 단호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어정쩡한 모습으로 독수리에게 끌려다니고 있다. “독수리야, 안돼! 나는 그 사람에게 복수하기 싫어. 그렇지만 그를 은근히 다른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게 괴롭힐 수는 있지. 독수리야, 나는 결코 네가 원하는대로 그 사람의 뺨을 치지는 않을 거야. 그러나 그의 약점을 아프게 건드림으로써 그를 괴롭힐 수는 있지.” 얼마나 많은 경우에, 이러한 모습으로 독수리와 타협하고 있는가?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후일지라도 우리 속에 숨어 있는 독수리의 근성이 그리스도인 생애를 괴롭힐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우리 속에서 독수리가 다시 머리를 쳐들고 부르짖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회개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단지 그것은 독수리의 근성이 여전히 내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참된 회개를 통하여 독수리의 근성이 우리를 주장하거나 장악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능력을 하늘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다. 참된 회개는 독수리를 못박아서 가두어 놓는다. 비록 독수리가 못박혀지고 가두어진채로 우리에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부르짖을지라도, 그 소리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는 없다. 독수리를 죽은 것으로 여기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힘차게 살아가면 된다. 독수리의 요구를 거절하거나 무시하기로 선택하고, 비둘기 같은 성령님의 호소에만 귀를 기울이는 삶을 살아갈 때, 드디어 독수리는 십자가에 못박힌채 피를 흘리면서 굶어 죽게 된다. 힘을 잃고 굶어 죽어가는 독수리의 절규와 애원을 추호도 동정하지 말라
“죄가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고 ... 너희 지체를 ... 하나님께 드려라.” 로마서 6:12~13.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시여,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 속에 계신 비둘기 같은 성령의 속성을 살찌우게 하자. 독수리는 십자가 형에 처하고, 오직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광만이 나타날 수 있도록 믿음으로 전진하자.
자아가 죽는다는 의미
그대가 소홀한 취급을 받거나 의도적으로 따돌림을 당할 때,
화내거나 맘 상함 없이 온유함을 유지하고 그것을 가치있는 고통으로 여기면서
상대방을 웃음으로 대하기로 결심한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가 어떤 어려움, 어떤 귀챦음, 어떤 성가심을 이웃으로부터 받고 있을 때,
예수께서 보여주셨던 사랑스러움과 유쾌한 분위기를 이웃에게 계속 선물할 수 있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가 어떤 음식, 어떤 외로움, 어떤 직업, 어떤 의복, 어떤 지위,
어떤 방해 하에서도 겸손한 만족과 평안함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의 최선의 노력이 오해받고 잘못 전달됨으로서 그대의 소원이 좌절되고,
그대의 충고는 무시되고, 그대의 의견이 비웃음을 당할 때,
그대의 마음 속에서 솟구치는 분노와 억울함을 부인하고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던 억울함을 생각하면서
그대의 경험을 자신에게 꼭 필요한 교훈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가장 혹독한 시련과 형제의 냉정하고 가혹한 대우로 인하여 생긴 가장 암울하고
우울한 감정이 그대의 영혼을 엄습할 때,
힘찬 찬미를 부르며 오히려 슬픔과 낙담에 빠져있는 가족과 이웃을 위로할 수 있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가 그대보다 부족해 보이는 사람으로부터 책망과 충고를 받았을 때,
그대의 육체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자존심과 반발심과 고집을 슬픔의 눈으로 내려다 보시는
그리스도께 도움을 청하는 긴급한 기도를 드린 후, 감사와 겸손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가 인생의 황혼기에서 자신의 영혼을 압도하는 듯한 죽음의 그림자와 외로움과
서러움을 힘있게 밀쳐버리고, 오히려 연약하고 우유부단한 젊은 자들을 꾸짖으며,
그들에게 진리를 위하여 자신의 온 힘과 정력을 불사르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가 인생의 청장년기에서,
이기적인 경쟁심과 그대를 자극하고,
물질에 대한 욕망이 그대를 사로잡으려고 으르렁거리며,
세상이 주는 유혹이 그대를 압도하려고 할 때,
또한 그대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즐기면서 아무런 문제없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일 때,
그대가 그대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무시하고 오히려 진리를 위하여 가난해지고
고난을 당하며 그 가운데서 참된 평화와 행복을 발견하기로 선택한다면,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그대의 타락하고 이기적인 본성으로부터 날마다 솟구쳐 올라오는
죗된 욕망과 절규를 무시하고 날마다 하늘의 거룩한 법을 순종하기로 선택한다면,
바로 그것이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스크랩 > 목회상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김종환의 칼럼] 자가 치유의 에너지 (0) | 2014.09.27 |
---|---|
[스크랩] 내적 치유의 4단계와 치유의 방법 9단계 (0) | 2014.09.06 |
[스크랩] 기독교 상담과 치유 64가지 요약 (0) | 2014.09.06 |
[스크랩]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0) | 2014.09.06 |
[스크랩] 성경적 상담 (0) | 2014.09.06 |